읽고 싶은 수필

대추나무/ 손광성

윤소천 2014. 1. 2. 09:00

 

 

 

 

대추나무 같이 볼품이 없는 나무가 또 있을까?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우연히 대추나무와 마주칠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벚나무 같은

화사함도 없고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같은 위용도 없다. 그렇다고

 가을이면 다른 나무들처럼 곱게 단풍이 드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해서 언뜻

보기에 아카시아나무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가지는 고집스럽게

 뻗어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없으리.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있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대추나무에서는

 시를 찾을 수 없을 듯싶다. 대추나무는 계절 밖에 산다. 봄이 와도 봄을 모르고

 가을이 되어도 여름으로 착각하는 나무다.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지고,

 벚나무며 라일락 같은 꽃나무들이 불꽃놀이라도 하듯 온통 분홍과 보라색을

 내뿜으며 부산을 떨어도 대추나무만은 이 모든 축제를 외면한 채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추나무를처음 심어본

사람은, 그가 비록 성급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도끼를 들고

그 밑을 서성거린 경험을 가지게 마련이다. 죽은 나무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 나무도, 그러나 청명과 곡우를 지나면서 그 검고 거친

껍질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딘 가지 끝에서 고양이 발톱처럼

 날카로운 움이 비로소 트는 것이다.

 

 다른 나무의 싹을 다 내몰고 나서 제일 나중에 나온다는 느림보 나무.

이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은 훨씬 뒤인 단오절을 전후해서 일인가 한다.

조용한 여인의 미소처럼 번지는 연두색 작은 꽃들. 육안으로 식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작아서 굳이 ‘꽃’이라는 화사한 이름마저 외면한 듯한 꽃이다.

 하지만 늦잠에서 깨어난 여인네처럼 대추나무는 이 빈약한 꽃으로나마

부지런히 밀린 봄을 서두르는 것이다. 제일 높은 가지 끝에서부터 시작해서

 잎과 잎 사이를 촘촘히 누비면서 피고 지기를 두세 차례. 그때부터 기이한

향기를 놓아서는 동네 벌이란 벌은 죄다 불러들일 기세다. 신은 가장 보잘 것

 없는 꽃에게 가장 향기로운 꿀을 마련한 것일까. 볼품없는 꽃의 어디에서

그처럼 감미로운 꿀이 넘쳐흐르는 것인지. 여름내 벌들의 소란으로 대추나무는

한 채의 잔칫집처럼 붐비는데, 그런 소란 속에서 작은 꽃은 나름대로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기만하다.

 화려한 색깔과 달콤한 과즙이 넘치는 과일들. 여름은 어디까지나

그것들의 계절이니까. 설익은 대추의 존재란 관심 밖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름도 그렇게 긴 것은 못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며칠 동안의

 따뜻한 햇볕과 첫서리와 그리고 조용한 기다림뿐이다. 추석을 전후한 어느 날,

 우연히 던진 우리의 시선 속에 드디어 나타나는 대추나무의 변모. 그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변신 앞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전신에 주렁주렁 드리운 것은 은근한 다갈색의 대추알

다발이다.  잘 익은 지마노라고 할까. 흔들면 칠금령七金鈴처럼 좌르르 울릴 듯,

 쳐다보는 이마 위에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감미로운 대추알

사태沙汰. 도무지 여름내 그 어설픈 잎사귀의 어느 갈피에 저렇듯 많은 비밀을

 숨겨 두었다가 일시에 이렇듯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것인지, 그만 입이 벌어질

뿐이다. 이 놀라운 풍요로움 앞에서 지금까지 대추나무에 가졌던 우리의 오해와

 편견은 일시에 수정되어 찬탄과 경이로 바뀌고 만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우러러보게 된다.

 

 대추나무는 결코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다. 볼품이 없는 나무요,

계절 밖에 사는 나무다. 그러나 겉치레를 모르는 나무요, 겸허한 나무이며,

서두르는 일이 없는 점잖은 나무다. 그리고 오래오래 참고 견디는

인고의 나무다. 그런 인고 끝에 맺히는 열매 때문일까? 한약에서 감초는 빠져도

대추는 빠지는 법이 없다. 대추를 먹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잠이 잘 온다.

그러니 이만한 덕을 가진 나무도 그리 많지 못하리라. 대추나무는 우리네

어머니와 같은 소박한 나무요, 겉보다 속정이 도타운 나무다. 뜰에 한 그루쯤

심어 두고 그 풍요로운 결실의 뿌듯함을 늘 실감하고 싶은 그런 나무다.

 

태초에 사랑과 정이 있었으니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가을 대추나무는 가끔 이런 시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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