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모두가 빈자리 / 정호경

윤소천 2014. 1. 4. 12:39

 

 

 

 저녁놀이 곱게 물든 서녘 하늘에 갈가마귀 떼가 까맣게 날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런 풍경은 문학이나 철학이나 또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저 아름답고 순수한 원시의 자연 풍경 그대로일 뿐이었다. 봄이면

채마밭에 장다리꽃이 노랗게 피지 않아도 평화로웠고, 여름이면 이 빠진

개가 부엌문 옆에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한가로웠다.

아무런 다툴 것도 괴로운 것도 없는, 우러르면 눈이 시린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나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돌아왔다. 올해는 비가

많아서인지 잡풀이 봉분을 엉성하게 덮고 있었고 무덤 한 쪽 모서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그리고 동생 무덤에는 아카시아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아무리 독한 약을 써도 끄떡없었다. “괭이로 뿌리째 파버려야 되겠구먼” 하니까.

예초기를 메고 간 인부가 질겁을 하며 그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고인의 시신이 다친다는 것이다. 나는 웃고 말았다.

 

 약 20년 전에 젊은 나이로 동생이 죽었다. 화장터로 가는 날 아침

비는 억수로 퍼부었다. 동생이 누워있는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간 한 시간 쯤

뒤에 삼십 센티 정도의 다리뼈 하나를 들고 나와 나에게 보였다. 무덤을

쓸 거라는 이쪽의 주문대로 처리한 것이다. 나는 동생의 유골상자를 들고

야간열차에 시달리며 고향에 있는 아버지 무덤 가까운 산자락에 묻어 주었다.

선친이 남긴 얼마 되지도 않은 유산 문제로 형님과 무던히도 다투더니 결국

남은 것은 짤막한 다리뼈 한 토막뿐이다. 그 후 형님과는 부모님 산소에 성묘도

함께 가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여태까지 헤어져 살아오고 있다. 동생은 가고

형님은 남아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이기고 진 것 없는 빈자리만이 허전하다.

 

 윤형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줄곧 같은 직장에서 거의 한평생을 나와

함께 지내온 막역한 친구다. 걸핏하면 중이 되겠다던 그는 정릉에서도 깊숙이

들어간 곳에 하숙을 정하였다. 부산에서의 피난 대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옮겨

동숭동에 있는 대학에 다닐 무렵이었다. 정릉 하숙집에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

걸어 나오는 데는 4,50분이 족히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런 생활을 1년 남짓

계속하던 그는 갑자기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정릉 골짜기에서 돈암동까지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는 길이 탈이었던 모양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알바

아니지만 그로 인한 증상이 악화되어 고환 수술을 받았다면서 운명에의

한탄이기보다 승복 같은 회색 옷을 즐겨 걸치고 다녔다.

 

 그 후 결혼은 했지만 처음부터 불행했다. 친구의 과묵한 성격에 그의

아내의 다변은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리는 짝이었다. 하지만 윤형은 그와 반대였다.

 하루 종일 말없이 앉아있는 아내이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둘 사이는 아이

문제로 다투는 날이 많았다. 그의 아내는 몇 번이고 산부인과를 다녀왔지만

자기에게는 탈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딸아이를 하나 얻어 기르다보니

사내아이 욕심이 생겨 또 한 아이를 얻어 길렀다. 그의 아내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이렇게하여 5,6년이 지난 뒤 그의 아내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윤형은 그전보다 더 말이 없어졌다.

 

 그러던 그가 하루는 시간을 내어 많은 말을 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내와의 결별을 몇 번이고 결심했지만 가엾은 딸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의 끈이 이토록 질긴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술을 못하는 그와 나는 맥주 한 병을 비우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그의

아내는 종일 절에서 산다고 했다. 절밥을 많이 얻어먹어서 배가 불룩한

줄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윤형의 낯선

아이는 셋으로 불어났다. 윤형은 십년 전에 암으로 떠났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말이 없던 그가 떠날 때는 더 말이 없었다. 그의 아내도 4,5년 전에 암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어 알았다. 이들 두 사람은 애당초에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연이었다. 그것도 윤형 어머니가 중매한 인연이라고

하니 인간사 참 우습지도 않다. 

 

 서울에서 살 때 금화조 한 쌍을 기른 적이 있었다. 값이 싼 새일수록

우는 소리가 좋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것에 있지 않았다. 기른 지 1년 만에

알 세 개를 낳았다. 그전에도 기른 적이 있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다.

언제나 따로따로 졸고 앉아 있었는데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는 일어나 보니 수놈이 떨어져 누워 있었다. 다시 수놈을 한 마리

사서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를 하더니 곧 사이가 가까워졌다.

재혼으로 맞아들인 수놈은 제 알도 아닌데 암컷과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품어

주기도 하고 새장 안에 떨어져있는 풀잎을 물어다가 보금자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새들도 인연이 따로 있나보았다.  알 셋 중 두 개만

성공하여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사이좋게 지저귀며 정다운 애무도 하곤 하더니

그 중 한 마리가 또 떨어져 누워 있었다. 또 수놈 쪽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놈

한 마리를 사서 넣어 주었다. 처음 하루는 서로 마주 보고만 있더니 뒷날부터는

어느 한 놈이 일방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새로 들어온 수놈이

목덜미의 털이 뜯긴 채 쫓기고 있었다. 2,3일을 계속하기에 하는 도리 없이

새장을 하나 더 사서 따로 떼어 놓았다.

 

 그랬더니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암컷이 은근히 그리워하는

눈치여서 다시 합방을 시켜준 다음 날, 수놈이 목을 비틀고 떨어져 누워 있었다.

어미새는 재혼한 남편과 금실이 좋았는데 딸 새는 술주정뱅이 원수를 만났던

모양이다. 나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새들의 인연과 사랑과 죽음을 보았다.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아픔은 일제의 침략과 국토

분단으로 인한 동족상잔이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지만 남은 사람은 말이 많다.

세계대전이나 종교분쟁, 인종 싸움으로 또는 천재지변으로 많은 생명들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가 아닌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일 다 그만두고 최근에 읽은 일본의 하이쿠 하나를

소개하면서 현재의 내 심회를 대신하고자 한다.

 

    ‘삶의 동반자 사라진 자리에는 캔 맥주만이’

 

 정년퇴임 후 주변 친구들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고 혹은 병들어

누워 있으니, 건배할 친구 없어 집에 혼자 앉아 캔 맥주를 마신다.

 

 (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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