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꽃그늘 / 도종환

윤소천 2013. 11. 19. 19:19

 

 

                                                  꽃   그   늘

 

 






 뒤뜰에 산 벚꽃, 앞산에 산 벚꽃, 산 벚꽃 피어서 화사한 날은 마음도

 꽃잎처럼 흩날립니다.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꽃가지에 마음의 겉옷을 벗어 걸어 놓고,

누구랑 연애라도 하고 싶습니다. 바람의 손에 이끌려 이 나무 저 나무 꽃그늘로 옮겨

다니는 이 마음이 이미 바람입니다. 자두나무 꽃 하얗게 피어 척척 늘어지는 다디단

향기가 내 몸을 칭칭 감는 것 같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까지 세다가 다섯 잎의

 하얀 꽃잎이 동그랗게 모여 피워내는 자두 꽃향기에 취해 저절로 눈이 감깁니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에 입술을 대어봅니다. 촉촉한 자두 꽃 젖꼭지에 닿는 제

 입술이 파르르 떨립니다.

 

 산 벚나무 꽃은 제 향기에 취해선지 제가 만든 꽃그늘에 취했는지, 새로 돋아난

어린 이파리의 목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게 보입니다. 산 벚나무 꽃가지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대니, 볼과 콧등과 입술을 스치는 꽃잎의 손길이 간지럽습니다.

꽃잎도 내가 느끼는 이 짜릿한 감정을 같이 느끼고 있을까요. 꽃 속에서 잉잉대는

 벌과 벌레들 날갯짓하는 소리에 섞여, 나도 꽃의 속살에 코를 박습니다. 가슴에서

 꿀벌 닝닝대는 소리가 납니다. 산 벚나무 꽃을 가슴에 안아봅니다. 그러나 팔 안에

담기는 향기의 적막한 공간,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가운데는 비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꽃과의 거리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꽃을 사랑하는 동안,

꽃잎은 찢어져 뭉개지고, 꽃가지는 꺾인 채 내 손에 들려있게 되겠지요. 꽃을 사랑하여

 꽃이 제 깊은 곳에서 내어준 꿀까지 가져가되, 꽃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벌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꽃은 꽃대로 향기롭고 나비는 나비대로 아름다운 사랑, 혼자 있어도

 아름답고 함께 있어도 아름다운 그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내 앞에 만개한

벚나무 꽃, 산 벚나무 꽃 앞에 혼자 있는 나, 그리고 화사함으로 사방을 가득 채운

빛과 텅 빈 고요, 이것도 색즉공色卽空이 아닐까 생각하다 한 편의 시를 올립니다.

 

          벚꽃 그늘 아래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 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중에서

 

 

  두근거리는 나를 들킨 듯도 싶습니다. 두근거림을, 두근거리며 살아가는

 생을 벗어놓아 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움과 사랑을 벗어놓는 길이요,

 서러움도 미움도 벗어놓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벗을 수 있어야 진정

알몸이라고 말합니다. 집에 이르기 위해서,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지치도록 걸어야

하는 생의 길, 부서져야 하는 삶, 거기서 오는 초조함과 적금통장까지 다 벗을 수

 있어야 비로소 알몸이라고 말합니다. 알몸의 정신으로 청정해져 보라고 합니다.

 벚꽃 그늘에서 다만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출렁거리지 말고 알몸으로

 청정해져 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줄 모르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이상으로 끌어올려, 아름다워진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꿀 줄 알 때,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텅 비워 청정해진 공간에 선함과 다디단

향기가 채우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봄기운, 거기서 비로소 공즉색 空卽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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