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102

탁족濯足 / 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생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읽고 싶은 시 2014.04.13

부드러운 속도 / 도종환

걸음을 멈추고 회화나무 아래 앉아 있다 시간은 내게 풀잎이 이슬 젖은 몸을 말리며 천천히 일어서는 속도로 왔다가 수련이 열었던 꽃을 닫는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가는 게 보인다 멈추니까 시간이 보인다 속도의 등에서 내려 이렇게 멈추어 있는 동안 속도는 오늘도 정해진 궤도를 거침없이 달려가고 내 다시는 궤도의 끝자리에 다다를 수 없어 많은 것을 놓치리란 예감이 든다 생활은 다시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갔더라도 언젠가는 내렸을 것이다 내리니까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내리고 나니까 가까운 이들의 얼굴이 꽃으로 보이고 꽃의 숨소리가 들린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은 것* 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으로 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나도 여기서 멈추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읽고 싶은 시 2014.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