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부드러운 속도 / 도종환

윤소천 2014. 4. 12. 06:43

   

 

 

        

                   

 

걸음을 멈추고 회화나무 아래 앉아 있다

시간은 내게 풀잎이 이슬 젖은 몸을 말리며

천천히 일어서는 속도로 왔다가

수련이 열었던 꽃을 닫는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가는 게 보인다

멈추니까 시간이 보인다

속도의 등에서 내려 이렇게 멈추어 있는 동안

속도는 오늘도 정해진 궤도를 거침없이 달려가고

내 다시는 궤도의 끝자리에 다다를 수 없어

많은 것을 놓치리란 예감이 든다

생활은 다시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갔더라도 언젠가는 내렸을 것이다

내리니까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내리고 나니까 가까운 이들의 얼굴이

꽃으로 보이고 꽃의 숨소리가 들린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은 것* 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으로

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나도 여기서 멈추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멈추어 선 숲도

언제나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고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저 산도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회화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고 앉아 있으니

하늘에 비친 세상의 얼굴이 보인다

 

 

* 김수영의 시 <절망>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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