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고 회화나무 아래 앉아 있다
시간은 내게 풀잎이 이슬 젖은 몸을 말리며
천천히 일어서는 속도로 왔다가
수련이 열었던 꽃을 닫는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가는 게 보인다
멈추니까 시간이 보인다
속도의 등에서 내려 이렇게 멈추어 있는 동안
속도는 오늘도 정해진 궤도를 거침없이 달려가고
내 다시는 궤도의 끝자리에 다다를 수 없어
많은 것을 놓치리란 예감이 든다
생활은 다시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갔더라도 언젠가는 내렸을 것이다
내리니까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내리고 나니까 가까운 이들의 얼굴이
꽃으로 보이고 꽃의 숨소리가 들린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은 것* 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으로
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나도 여기서 멈추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멈추어 선 숲도
언제나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고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저 산도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회화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고 앉아 있으니
하늘에 비친 세상의 얼굴이 보인다
* 김수영의 시 <절망>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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