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높고 푸르게 / 김소운

윤소천 2019. 8. 26. 08:37

                                     

 

 

 흔히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니 <등화가친지절>이니 한다.

기후가 신선해서 책읽기에 알맞고 밤이 차차로 길어져서 여름내 못했던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그런 뜻이겠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더위가 기세를 부리던 여름이나 혹독한 추위가

만물을 꽁꽁 얼게 하는 겨울과는 달라 가을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침정沈靜 내성內省의 계절이다. 누구를 위협하지도

긴장시키지도 않는 겸손의 계절이다.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한잎 두잎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고, 치달리던 생활의 수레바퀴를 잠시

멈추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기에는

가을 같이 알맞은 계절도 없을 것이다.

 

 이럴 때 읽는 책 한권은 그냥 고스란히 마음의 영양소가 되리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을과 독서를 결부시키는 가장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등화가친이란 문자는 있지만, 책을 경원하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생리라고 한다. 학교 공부의 연장으로

도서관을 찾는 학생들은 많으나 정신의 윤활유로 사색을

위하여 책을 펴드는 사람은 실로 드물다.

 

 그날 벌어서 그날을 살아가는 극빈층이 아니고는 어느 집 없이

서가라는 것이 있지만 과연 그중에서 마음을 기르려고 책을 효용效用하는

가정이 몇 프로나 될 것인가. 그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차간이다. 버스는 진동으로 해서 시력에 해롭다는 빙자라도 있지만

기차간... 그나마 장거리여행의 좌석이 확보된 특급열차 안에서도

책 읽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만치나 어렵다. 읽는다는 것은

고작 주간지 아니면 그날 신문...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학력이 없고 지위가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다.

 

 생활문화와 담을 쌓는 미개인들도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 같은 데서는

붐비는 통근차간에서 손잡이에 매달려 이리 저리 뒤흔들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그들의 몸에 배인 생활 풍습이다. 하물며 버스나 기차로

장거리 여행을 떠날 경우 행장 속에 책 몇 권 안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 책을

권장하자고 이런 얘기를 내 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서를 외면하는

풍토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정신의 영역이 푸대접을 받는 사회, 성실과 노력 보다는

요령과 눈치가 실효를 거두는 사회, 거기에는 인간을 형성하는 정신의 밑거름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재치 있게, 눈치 빠르게, 남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앞질러가는 자만이 언제나 우위를 차지한다. 거기서 조장되는 것은 성실 보다는

교활, 충직보다는 아부... 그래서 <정직하면 못 산다> <순진할수록

손해를 본다>는 생활철학이 생겨진다. 이런 풍토에서 책이 읽혀질 까닭이 없다. 

고려, 이조의 청자 백자며 신운神韻에 가까운 우리 조상들의

공예미술품들은 하나같이 지순한 천심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요, 어느 연적 하나

어느 문갑 하나 속임수나 잔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없다. 그러기에

천년이 가고 이천년이 지나도 거기에 생명의 유동流動이 굽이치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D출판사의 부촉으로 <한국미술전집> 15권의

일본어판을 담당했었다. 그 때 수천 년 동안에 걸친 내 조상의 업적을

하나하나 다루면서 내 가슴속에 알지 못할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분명 이 나라 이 땅의 조상인데 그 조상의 손으로 어쩌면 이토록

팃기없는 예술이 이루어졌을까>... 그 의문은 곧바로 <이런 훌륭한 조상의

후예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창의를 상실한 얼간이로 퇴화해 버렸을까>

하는 또 하나의 의문과 직결된다.

 

아무리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도 같은 한줄기 피를 이은

그 조상 그 후예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정치적인 과오나 실책은

있었겠지만 민족적인 기품氣禀과 예술의 향기에 있어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자랑스런 조상을 가졌었다.

그런데도 마땅히 우리가 물려받았어야할 그 창의와 운치...

대자연의 호흡과 혼연일치渾然一致했던 그 소탈한 멋과 분방자재

奔放自在기백은 모두 어디로 가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어느 분이 와서 들려준 얘기다. <집을 잘 보라고>일렀더니

국민학교에 갓 들어간 그 딸이 자못 의아스런 표정으로 <엄마 ! 집은

보는 거야 ?>하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집을 잘 보아라.

누가 와도 문을 열어 주지 말아라” 이런 말을 어른들은 무심코 하지만

 천진한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만한 얘기다. “집은 왜 보느냐?” 이 바보스런 질문

속에 우리가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귀중한 무언가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문단속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문밖에는 도둑이 있고 유괴범이 있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면 불가불

그 현실에 대비할 수밖에 없으나 그로해서 정신생활의 밑뿌리까지

흔들려서는 안 되겠다는 얘기다. 도대체 지금 우리 생활에 뿌리라는 것이

있는가. 해방 삼십년이 지나도록 언어생활 하나가 정리되지 않은...

 약품하나 과자하나에 까지 외국과의 기술제휴를 내세워야하는 이것이

우리들의 지금 생활이다.  채소장수가 채소 몇 단을 따로 돌려 놓길래 그건

뭐냐고 물었더니 단골집에 가져갈 거라는 대답이다. “그럼 그 쪽이

좋은 거로구먼” “아녀요, 시들어져서 팔 물건이 못돼 단골집에 가져가는

거랍니다” 단골이니 좀 시들어도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믿어 주는

 사람일수록 더 속이고 값을 깍지 않는 손님에게는 더 비싸게 부르고...

물론 장사꾼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인간 세상의 상식과는

역행하는 이런 각박한 우리들의 현실을 지하의 조상님들은

과연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실까.

  

 천심天心 도로 찾아야 하겠다. 조상의 그 팃기 없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다. 사람마다 서로 잘

살아보려고 허겁지겁 줄달음을 친다. 돈도 벌어야겠고 출세도

해야겠고 이름도 내야겠고 ... 그것을 부인도 부정도 하는 것은 아니나,

생각하고 보면 서글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있은 뒤에

돈도 출세도 있는 것이련마는, 그 돈으로 해서 인간이 종노릇을 해야 하는

이 희화戱畵같은 현실... 단 한번 밖에 태어나지 못할 일생을 그렇게

살다 마치는 것은 진정 애석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68년의 과거를 돌아보아 뉘우치는 일, 한스러운 일이 어찌

한둘에 그치리오마는 다만 하나, 돈에도 이름에도 마음이 사로잡힌 일이

없었다는 것... 그것만은 스스로 흐뭇하게 생각하는 고마운 일의 하나이다.

나는 종교가도 도학자도 아니지만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의 한

구절만은 일생토록 지켜 온 것 같다. 여기에다 나의 얘기를 꽂아 넣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나 가을을 재촉하는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짐짓 지나온 도정을 돌이켜 본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 왔던가 ? 어떤 이는 재주를 믿고 어떤 이는

학벌을 믿고 또 어떤 이는 재력을, 권세를 믿고 산다지만 내게는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어떤 적의敵意 앞에서도 완전

무방비의 알몸뚱이였다. 내 재간이나 내 슬기로 나를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섭리에 거역하지 않고 언제나 주어진 조건에 순응했을 따름이다.

애당초 잃어버릴 것이 없었기에 마음 편하기도 했다. 인생을 투쟁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런 이에게는 나 같은 무방비의 인생행로가

그지없이 허술하게 보이겠지만

 

    가을하늘 광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일세

      

 애국가의 셋째 절 가사 그대로 맑게 개인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게 살고 싶다. 우직하게 소박하게... 서로 믿으면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 1975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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