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빛나지 않는 빛 / 반숙자

윤소천 2019. 9. 2. 09:14

 

 

 

 

 

거실 벽에 액자 한 틀이 걸려 있다. 비록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에 어떤 예술 작품 못지않은 의미를 둔다.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이 액자에 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의 뜻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쉽게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액자에는 하얀 여백에 ‘眞光 不煇’ 라는

 글씨가 두 줄 종으로 쓰여 있고 줄을 바꿔 ‘賀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上梓’라는 글씨가 역시 두 줄로 있다. 다음은 여백을 넉넉히 두고 대나무를

그렸고 아래는‘1986년 처서절’이라 쓰여 있다.

처음과 끝 부분에 낙관을 찍었다.

 

15년 전의 이야기다.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았다. 특히 출판을 맡아주신 출판사 사장님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는 수필가로 살아가는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없는 아이가 그렇듯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온 이야기를 썼다.

썼다기보다는 가슴에 차고 넘쳐서 어쩔 줄 모르다가

 수필이라는 분화구를 만나 용암처럼 뿜어 올려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고졸한 그림과 글씨로 축하를 보내주신 분이 계시니

원로 이신 Y선생이시다. 그 황감한 선물을 받고 한동안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쁨을 혼자 누렸다. 특별히 신경을 써서 표구를 해서

거실에 걸어 놓고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듯한 청복을 누렸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올 때는 보물 상자를 안고 오는 마음으로 무릎에

싣고 왔다. 아파트 환한 벽에 액자를 걸었다.

 

어느 날이었다. 도장을 받아야 할 우편물을 가지고 온

우편집배원이 현관에 선 채로 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였다.

그러고는 “진,광,불,휘, 차암 좋네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갔다. 우체부가 돌아가고 나서 그 뜻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뜻을

풀이하면 ‘참된 빛은 찬란하지 않다.’로 되겠는데, 빛이 빛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무슨 뜻으로 나에게 이런 글귀를 손수 써 주셨을까. 그 뒤로는 액자

앞에 서면 그냥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고 기뻤다

부끄러웠다 뒤범벅이 되어갔다.

 

겨울을 빼고는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이 있다. 봄이 되면 사과꽃이 피어난다. 여름이면 콩꽃이

피고 고추나 옥수수, 벼꽃도 핀다. 그런데 이런 꽃일수록 작고

미미하고 볼품이 없는 거였다. 뜰에는 칸나, 접시꽃, 모란꽃이

여왕인 양 피어나 마음을 사로잡는데 과일이나 곡식을 맺는 꽃들은

보잘것없고 피는 듯 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여름내 성숙시킨 열매들로 존재를 드러낸다. 어찌 꽃들뿐인가. 사람들

세상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십대의 젊은이가 매스컴의 각광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을 하나 얼마

가지 않아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한평생을 바쳐 문학의 외길을 걸어 후세에

빛날 작품을 남기는 분들도 있다.

 

그 동안 나는 액자 앞에 수백 번 섰다. 대나무의 곧음과

맑음을 보탠 기품 있는 글씨, 그리고 글귀에서 풍기는 깊고도 깊은

의미를 수없이 짚어 보았다. 특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일 때 이 글 앞에 서면

선생의 격려의 말씀이 들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따가운 채찍으로

 나의 허영을 나무라 주고 어떤 날은 기다림과

정진이라는 묵언을 주기도 했다.

 

지난여름 괴산 화양동 골짜기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청소년 수련원에 연수를 온 젊은이들을 위한 행사인 듯했다. 개울가에서

불꽃을 쏘아 올리는 모양이었다. 하늘로 치솟는 어떤 물체가

어느 순간 공중에서 탁 타닥 하며 터지면서 무수한 불꽃을 방사했다.

캄캄한 시골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은 처연하도록 찬란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온 세상을

밝힐 듯 환해졌다가 금세 재로 사라지는 향연, 향연 뒤의 어두움은

더욱 깊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며 올려다 본 하늘에는 찬란한

불꽃놀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빛이 참으로 영롱했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 그런 빛, 태초부터 비춰왔을 그런

빛을 진광眞光이라 하는가. 그럼에도 나는 한순간일망정 불꽃처럼

타올라 소진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나의 어리석음은

 언제나 끝나려는지. 휘황하고 찬란할수록 섬광처럼 사라지는 이승의

불꽃놀이에 현혹되어 억만 광년을 빛나고 있는 별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찬란하지 않아도 어둠이 깊을수록 영롱해지지 않던가.

평생을 조용히 문사로 살아오신 선생의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영원한 빛의 존재이시다. 선생께서는 내 얄팍한 근기를 미리 아시고

불꽃놀이의 허망함을 알려주신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진광불휘 眞光 不煇, 이즈음에는 또 다른 뜻으로 나를 채근한다.

30년 수필을 써왔지만 아직도 완벽한 글을 쓰지 못하는 나에게 정말

좋은 글은 번드레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다.이 액자는 재산 목록 1호,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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