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윤소천 2019. 8. 30. 07:08

      

             

 

 누구나 밤사이에 내린 첫눈을 보고 탄성을 내지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와, 눈 왔다! 일어나!” 식구들 중에 먼저

일어난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면 잠옷 바람으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다가 가슴 벅찬 감동에 파르르 몸을 떤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밤사이에 한껏 내려 나뭇가지마다

소복소복 눈꽃을 피우고 있는 함박눈을 보며 “올해 첫눈이야!

첫눈이 내렸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이의 모습부터 먼저 떠올린 기억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은 왜 첫눈이 오면 그토록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 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트불을 밝히고 하나의

풍경이 되어 서 있는 군밤장수한테 군밤을 사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젊음을

잃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첫눈은 첫사랑과 같은 것인가.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창밖을 본다.

거리의 나뭇가지마다 켜켜이 눈이 쌓여 있고 하늘은 더욱 푸르다.

첫눈이 내렸을 때 만나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을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리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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