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햇빛과 달빛 / 석모용

윤소천 2019. 8. 19. 09:08

 

 

 

 

 사람마다 개성이 있듯 고양이 또한 개성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어릴 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는 고양이를 키워왔지만 함께 산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다. 그러나 검동이(黑黑)와

홍동이(紅紅)는 참으로 특별한 한 쌍의 고양이였다. 그들은 한 배에서 난 자매로

우리 집에 함께 팔려와 살게 되었다. 애완견센터에서 이 두 녀석을 안고

오던 날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었다. 그때 철(慈兒)은 막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고,

칼(凱兒)은 아직 초등학생 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민성동루(民生東路)**에는,

집안까지 햇빛이 쫙 들어오는 아파트가 없었기 때문에 이 귀여운

녀석들이 바로 우리 집의 햇빛이었다. 아니 아마도

‘햇빛과 달빛’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홍동이는 어릴 적부터 대단히 열정적이고 천진난만하며 늘

주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여 어떤 장난을 걸어도 잘 응해 주었다.

그 천진무구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볼 때면,

우리는 늘 이 꼬마 고양이를 노리개 삼아 짓궂게 장난을 하곤 하였다.

 그러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듯 미안해 품에 안고 토닥거려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을 금할 길 없는 그런 녀석 이었다. 그러니 검동이는

이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검동이는 처음부터 짓궂은 꾐에 빠지지 않고,

놀이가 시작되면 바로 한 옆으로 물러나 방관만 하는 양이 천진난만하고

열정적인 홍동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단히 위축되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품에 안고 가볍게 털을 쓰다듬어주면 가릉 가릉 내는

소리마저 홍동이에 비해 훨씬 허약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은 은연중

모두 홍동이에게 관심이 쏠렸다. 장난치고 놀리고 포옹하고, 나는

녹음기에 홍동이의 가릉 내는 소리를 녹음해 친구들과 전화할 때 들려주었다.

많은 친구들이 홍동이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너희 집 그 ‘예술가’

근황이 어때?” 비록 똑같이 먹이고 손님이 오면 똑같이 소개시켜 주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철학가’로 이름 붙인

검동이는 어린 시절 푸대접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사오 년의 세월이 흘러 딸아이 철(慈兒)이 대학에 다닐 쯤에야,

비로소 검동이의 내재된 열정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는

푸싱난무(復興南路) 부근의 아파트 한 채를 전세 내어 살고 있었는데,

아들 칼(凱兒)도 고등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아이들 둘 모두 공부가 힘겨울 때였다.

한 밤중 누이와 동생은 각자 자신의 책상 앞에서 영원히 해도 다 못할

그 공부라는 것을 하고 있을 때, 검동이와 홍동이는 각자가 작은 주인이라고 굳게

믿는 그 작은 주인 곁에 쭈그리고 앉거나 때로는 의자 곁에서 때로는 전기스탠드

밑에서 주인을 모시며 긴긴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이 때 홍동이는

단지 함께 있어준다는 의미 밖에 없었다.

 

 점점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한 마리 고양이가 아들의 발 옆에 누워

있거나 눈앞에서 편안하게 잠자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평안하고

온화하게 보였다. 검동이의 모심은 홍동이 와는 많이 달랐다. 검동이는

늘 딸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딸아이가 글 쓰는 것을 집중하여 바라보거나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느 날 밤, 철(慈兒)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철은 검동이를 안고 창가에

서 있었다. 딸의 시선은 창밖의 나무를 응시하고 있었고, 품속의 검동이는

 그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동자로 철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 편으로는

가르릉대는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철(慈 兒)이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엄마, 나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검동이가 알고 방문 앞에 서서

야옹야옹 울잖아, 그래서 내가 안아주니까 이렇게 가르릉거리며 줄곧 날

쳐다보고 있네, 아마 검동이가 날 위로해주고 싶은 모양이야.”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 밤중 우리는 유달리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고양이를 본 것이다. 아이들이 점차 자라 한 아이는 학교 기숙사로

한 아이는 학교 부근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나갔다. 집안에는 나 외에 단지

부모님들만 남았다. 어머니는 늘 밤을 지새우며 원고를 쓰셨는데,

그런 밤이면 홍동이는 조그만 제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러나 검동이는

언제나 내 곁에 붙어 있으면서 살갑게 굴었다.  

 

 우리 집이 딴쉐(淡水)로 이사를 했다. 이 지역은 조그만 산비탈에

위치해 있어서, 밤이면 달빛이 너무나 맑고 시원하여 차마 잠자리에 들기가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런 밤이면 나는 늘 베란다에 서서 물처럼 출렁이는

달빛 풍경을 마음껏 탐닉했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서로 사모하듯 나뭇잎에

달빛이 깃들었다. 나무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들쭉날쭉 땅위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그 즈음이면 검둥이는 나를 따라와 내 다리를

휘감으며 품속에 안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내가 포근히 안아주면

검동이는 예의 가릉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검동이를 보면

둥글고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이 필요하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그러나 사실 말없이 주고받는 신체언어야말로

하찮은 정보들을 여러 종류로 다르게 바꾸어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11년 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와 고락을 함께 한 검동이는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와 소통해오고 있는 것이다. 달빛이 강물처럼 출렁이고 산들바람

부는 달밤이면, 사람과 고양이가 베란다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서로

온화하고 유쾌하고 쓸쓸한 정보들을 조용히 주고받는다.

 

 

   * 시무릉(席募容)

    1943년 사천에서 태어나 대만 예대예술과 졸업. 십여 차례 개인전을 연 화가이자

   중국어 문화권에서 빼어난 인기를 기록하고 있는 시인. 시집 <영혼의 탐색> <그림 시>  

   등 다수. 전통적인 것에 모더니즘을 가미한 애정관으로 사랑의 득실과 허실에 대한

   철학 적 관조를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탐색.

 

   **민성동루

(民生東路)

    필자가 살던 집의 도로 명 주소의 일부로 보이며 상당한 규모의 대도시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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