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관상觀想 휴가 / 박노해

윤소천 2024. 7. 16. 19:53

 

 

 

장마 전에 난 정말 바쁘다

감자알을 캐고 블루베리를 따고

오이를 따 소금에 절이고

별목련과 팥배나무를 캐다 심고

정원의 꽃나무들 가지치기를 하고

수로를 파 물길을 내주고 나면

나의 7월은 끝, 휴가다

 

나의 여름휴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상觀想 휴가

문 앞에 “묵언 중입니다. 방문 사절. 미안.”

팻말을 내걸고 전화기도 뉴스도 끊고

테라스에 집필 책상과 의자를 치우고

낮고 편안한 의자를 놓고 기대앉아

묵연히 앞산을 바라보다 구름을 바라보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고

불볕에 이글거리는 들녘을 바라보다가

 

느닷없는 천둥번개와 빗금 쳐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순간 세계가 변하는

서늘한 기운에 잠깐 우수수 하다가

겹겹진 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쏟아지며

커다란 무지개가 갈라진 세계를 잇는 듯한

장관을 눈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다시 한여름의 정적이 오고

총총한 별들과 반딧불이의 춤 속에

죽음보다 깊은 잠이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쓰지 않고

눈앞의 풍경과 눈 감은 세계와

두 세상 사이의 유랑 길에서

분주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상념과 감정과 고해와 내면을

오롯이 지켜보는 깊고 치열한 쉼

 

내 여름 관상 휴가 끝

자아, 무엇이 시작될까

무엇이 나를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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