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전에 난 정말 바쁘다
감자알을 캐고 블루베리를 따고
오이를 따 소금에 절이고
별목련과 팥배나무를 캐다 심고
정원의 꽃나무들 가지치기를 하고
수로를 파 물길을 내주고 나면
나의 7월은 끝, 휴가다
나의 여름휴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상觀想 휴가
문 앞에 “묵언 중입니다. 방문 사절. 미안.”
팻말을 내걸고 전화기도 뉴스도 끊고
테라스에 집필 책상과 의자를 치우고
낮고 편안한 의자를 놓고 기대앉아
묵연히 앞산을 바라보다 구름을 바라보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고
불볕에 이글거리는 들녘을 바라보다가
느닷없는 천둥번개와 빗금 쳐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순간 세계가 변하는
서늘한 기운에 잠깐 우수수 하다가
겹겹진 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쏟아지며
커다란 무지개가 갈라진 세계를 잇는 듯한
장관을 눈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다시 한여름의 정적이 오고
총총한 별들과 반딧불이의 춤 속에
죽음보다 깊은 잠이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쓰지 않고
눈앞의 풍경과 눈 감은 세계와
두 세상 사이의 유랑 길에서
분주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상념과 감정과 고해와 내면을
오롯이 지켜보는 깊고 치열한 쉼
내 여름 관상 휴가 끝
자아, 무엇이 시작될까
무엇이 나를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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