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하늘잠자리 / 손광성

윤소천 2023. 11. 21. 12:09

 

 

 

 

 가을 하늘에 홀연히 나타난 한 무리의 하늘잠자리. 참 가볍다.

얼마를 덜어내야 저만큼 홀가분할 수 있을까. 중력조차 따돌린 가뿐한 부상.

내장을 토해 낸 듯 홀쭉한 배. 햇빛을 투과시켜 버리는 삽상한 날개.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은 없다. 투명하다. 투명한 것들은 자주

침묵한다. 무엇을 더 해명하랴. 이미 속속들이 들켜 버린 것을. 말을

입는 순간 자명한 진실도 모호해져서는 뒤뚱거리게 되는 법. 종파에

관계없이 수행의 기본이 묵상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늘잠자리의 침묵은 그러나 고행승의 그것처럼 무겁지 않다.

맑고 밝고 가볍다. 이루려는 자의 침묵이 아니라 이룬 자의 침묵 같은 것.

그런 회심의 침묵에서는 언제나 맑은 향기가 난다. 모진 겨울을

 견뎌  가지 끝에 비로소 핀 한 송이의 매화처럼. 날고 있다. 파란 하늘

속을 꿈꾸듯 날고 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나부끼는 우리의

꿈과 사랑과 희망처럼, 꼭 그만한 높이에서 하늘잠자리가 날고 있다.

 

땅이란 험한 현실을 딛고 서기에는 여섯 개의 다리로도 불안하단

말인가. 아니면 결코 발에 흙을 뭍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일까. 허공에

의지한 채, 하늘잠자리는 공중 부양을 취한 듯 도무지 내려올 생각이 없다.

죽어서도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잠자리들의 숙명. 죽어서도 꿈을 접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비극. 선택이 아니라 운명일 때, 꿈도 이상도 분명

고통일 테지만, 단 한 번의 눈이 시린 아득한 비상을 위해서라면

한 백 년쯤 잘 참고 견뎌 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나 모든 가벼운 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꽃향기처럼,

물안개처럼, 살아서 고단했던 어느 한 사람의 나직한 숨결처럼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낯가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조차 미안하단 말인가. 찬바람이 이는 어느 가을 석양 무렵, 파란 침묵을

한 자락 끌며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하늘잠자리의 아득한

소멸. 그 깨끗한 소멸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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