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로 나는 산에 올랐다.
또다시 죽는 시간의 불확실성에 대해 명상했더니
마음의 본성이 죽음을 넘어선
영구적인 요새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밀레르파의 시 중 일부>
이 가을에 나는 꽉 채워서 예순 살이 되었다. 그사이 나는 꽤 오랫동안
시간이 주는 고통스런 억압 속에 있었다. “청년작가‘라는 별칭으로 불릴 때도
내 가슴속 어둑신한 동굴엔 시간이 유장하고 속절없이 흘러갔다. 늙고
병들고 죽어갈 소멸의 과정을 생각하면 언제나 앞이 캄캄해졌다. 그 가혹한 실존
앞에 서면, 글쓰기에 대한 욕망도 어떤 사회적 지위도 다 소용없었다.
나는 그래서최근 몇 년간 글쓰기조차 온통 미루어 놓고,
세상 끝까지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가을에 내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겉으로는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시시각각 나는 내 안에서 어떤 경이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최초의 징후는 예순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북한산을 올랐을 때 찾아왔다. 산마루턱 너럭바위에 길게 누워 있던 중, 갑자기
하늘과 구름이 쏙 다가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맞은편 산허리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맞은편 산허리도 망원경 렌즈
속의 그것처럼 선명히 다가와 있었다. 나는 고갯짓을 하고 눈을 비빈 뒤에
다시 산과 산 아래 마을과 하늘과 구름을 보았다.
마치 뿌옇게 먼지가 낀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놓은 것 같았다.
서늘한 샘물이 내 몸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드는 느낌이 동시에 왔다.
늘 다니던 산길이니 모든 게 익숙한 풍경인데, 그러나 그 모든
풍경이 갑자기 너무 환해져서 처음 보는 듯했다. 세례 받은 다음의 느낌이
그럴까. 나는 행복하고 충만한 기분을 느꼈다. 뛰듯이 산을 내려와
저녁 식탁에 앉아 있을 때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미친 여자 속곳이라도 봤나,
왜 실없이 웃고 그래?” 아내가 물었고 “글쎄, 모르겠어. 자꾸 웃음이 나오네.”
나는 대답했다. 다음 날도 나는 여전히 행복했다. 하늘은 티 없이 맑았고,
마당귀에선 다투어 가을꽃들이 피어났다. 여름에 심은 배추를 노끈으로 하나씩
묶어주면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일주일 이상
계속됐다. 시력이 갑자기 좋아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충만한 마음으로
안경점에 들러 시력을 재보았다. 그렇지만 시력은 별로 변화가 없었다.
“풍경이 모두 전보다 환해 보이는 데요,” “기분이 좋으신가 보죠 뭐.
시력은 변함없으니 쓰시던 안경 그대로 사용하시면 돼요.” “네, 행복하십시오.”
나는 어린애처럼 밝게 인사했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시간의 문제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따라서
내 몸과 정신도 유연하게 흐른다고 나는 느꼈다.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쌓아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붓다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음식이 얹힌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지던
증세도 씻은 듯 사라졌다. 나는 너무도 밝은 목소리로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를
암송했다. 너무도 오래,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명백했다. 사랑받으며 사느라 나는 나이만 들었지,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느꼈는데, 철이 안 들고 살아오면서 가족을 굶기지
않고 지냈으니, 그것 또한 사막 같은 세상에서 내가 특별히 누린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행복해졌고, 오랫동안 감금돼
왔던 감옥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았다.
티베트에선 자유를 네중(ngejung)이라고 부른다. 네(neg)는
‘현실적으로’ ‘틀림없이’를 뜻하고, 중(jung)은 ‘나오다’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구름에 가렸다가 빠져나온 달처럼, 어떤 장막으로부터
벗어나, 홀연히 자신의 본성이 빛날 때가, 바로 완전한 자유의 상태다. 거짓말
같을 테지만, 이 가을에 나는 ‘네중’의 홀가분한 환희를 계속 느끼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끝없이 갈구하던 어떤 세계에 진입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여름에 나는 티베트의 카일라스 산에 다녀왔다. 동양 종교의
성지이자 ‘눈의 부처’라고 불리는, 카일라스는 일명 수미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지구의 배꼽이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산이다.
카일라스를 한 바퀴 순례하면, 일 년 동안의 모든 카르마(業)가 사라지고,
세 번만 순례하면 일생 동안의 번뇌 망상과 집착이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지난여름 한 달여 동안 티베트를 여행했고, 티베트 서부 오지에 있는
카일라스도 물론 다녀왔다. 해발 5,630m 타라 고개를 넘을 땐,
너무 고독하고 힘들어 눈물을 쏟기고 했다.
그렇다고 카일라스 산의 순례에 따른 효과가 내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티베트불교의 위대한 시인이자 성인인 밀레르파는 ‘공(公)을
보면 자비심이 솟아난다.’고 말했거니와, 티베트 고원의 그 텅 빈 황야가
나의 변화를 주도했다고 말하는 것도 어색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붓다가
말한 바로는 영혼의 심연 속에 감춰져있는 본성 뿐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바닷물을 퍼부어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것이다.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부자든 빈자든 상관없이, 이른바
삼독三毒을 씻어내고 나면 누구든지 바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그 등불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본성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떤 나쁜 환경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환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늙는 것이 두려웠다. 어떤 땐 두려워서
실신할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고, 또 어떤 땐 수천 미터 높이의 낯선 산야를
죽을 둥 살 둥 헤매기도 했다. 갈망과 염원은 나날이 깊어갔지만
내가 가진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만약 이 가을에 내가 받은 축복이
있다면, 돌이켜보거니와, 절절히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두려움이 준 선물이 아닐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우리의 매우 깊은 두려움은 우리에게 깊숙이 박혀있는 보물을 지키는 용과
같다”고 했다.두려움이 없었다면 시간이 무엇이고, 불멸의 꿈과
필멸의 실존 사이에 얼마나 혹독한 단층이 있는지 묻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갈망과 염원이 깊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빛깔은 좀 바랜 듯하지만,
내 속에서 일어나는 충만감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나는 이 가을이 행복하다.
믿거니와, 이것은 실존의 두려움에 따른, 나의 깊어진 갈망과 염원이
가져온 선물일 것이다. 갈망과 염원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신의 후광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의 비극성은 신을 버리고도,
등불 같은 본성을 욕망의 감옥에 유폐시켰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갈망은 욕망이 아니라 눈물겨운 그것,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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