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생활이란 참으로 밋밋하고 평범하다.
그 평범한 나날을 느슨한 정신으로 지내다보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비슷한 날들이 계속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그저 낯익고 익숙하기만 해서, 지각(知覺)을 흔들어
깨울 만한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니 어느 순간, 그 낯익고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 낯설음 앞에서 우리는 순간
당황하게 되고, 그 당황함은 잠자던 사고(思考)를 자극하여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낯설음을 글로 표현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이것을
우리는 소재의 충동이라 하는데, 이 충동이 없이는 글은 씌어지지
않는다. 모든 글은 이 충동에서 비롯된다. 글쓰는 사람들에게, 아니
예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충동이란 창작 의욕에
불을 지르는 기름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재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비망록에 적어둔다. "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제일 연한 잉크로
쓴 글에 미치지 못"(중국 속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재에서 끄집어낼 주제도 함께 써놓는다. '이건 수필감이다' 하고
소재를 만나는 그 순간에, 이미 주제까지도 동시에 떠오르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금방 작품화하지는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한 초기에는 마감 날짜에 대는 게 겁이 나서 미리미리
써두곤 했지만, 지금은 청탁서가 와야만 비로소 펜을 들게 된다.
비망록은 내겐 보물 상자와 같다. 내 보물들은 값진
보석이나 장신구들이 아니라, 바로 수필감, 즉 소재들인 것이다.
이 비망록에 소재들이 많이 비축되어 있는 한, 급한 청탁서가 와도
전혀 겁날 게 없다. 그런데 소재 중에는 일년이 넘어도 작품화되지
않은 채로 그냥 있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쉽게 써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마음속에만 깊이 간직해두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비망록 속에서 잠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맛좋은 포도주가 되려면 발효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것들은
내 머리 속에서 조금씩 숙성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청탁서가 날아오면, 그것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마음의 심지에 불이 당겨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청탁해온 지면에
알맞은 소재를 골라놓고, 그것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서술 방법은, 주제를 서두에 명시하는 연역적인 구성보다
그것을 끝까지 지문 속에 감추어두었다가 끝 부분에 가서 독자에게
암시하며 여운을 남기는 귀납적인 방법을 택한다. 그런 구성이 내겐
더욱 수필적인 맛과 독자를 끌어가는 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첫 문장이 발효된 생각 속에서 거품처럼
떠오르고, 끝마무리가 어렴풋이 짚이게 되면 본격적으로
글을 써 내려갈 채비를 한다. 글을 쓰던 초기에는
원고지에다 썼으나 지금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원고지에 써야만 글이 나올 것 같았던 습관도
이제는 컴퓨터로 쓰지 않으면 글이 풀리지 않게 되었다.
글을 쓸 때, 나는 구체적으로 순서를 매겨놓고
쓰지는 않는다. 첫 문장만 생각나면 절반은 쓴 셈이나
마찬가지여서, 써 내려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손끝에서 생각이 풀려나올 때가 많다.
그러나 글은 서두 몇 줄이 제일 쓰기 어렵다. 이 고비만
넘기면, 글은 가속도가 붙어 무난히 한 편을 완성하게 된다.
처음 부분에서 생각이 막히게 되면, 지금까지 쓴 것을
거듭 읽어본다. 바로 이럴 때가 자신에게 문재(文才)가 없음을
실감하면서 깊은 절망감을 맛보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다가 다행히 물꼬가 트이는 것처럼 다시 생각이 떠올라 주어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끝마무리에 이를 때가 있다. 그러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글을 쓰게 된 순서가, 소재를 먼저 발견한 다음
거기에 주제를 부여했다 해도, 쓸 때는 그와 반대로 주제의식을
갖고 글을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가끔 예외가 있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글의 성격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지금까지 쓴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써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작품을 가차없이 깨뜨려
버리는 일과도 같다. 잘못된 글에 미련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의 글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안다면
그는 이미 글의 고수(高手)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밤에 정신이 맑고 집중이 잘 되는 편이라서,
주로 자정부터 쓰기 시작하여 서너 시면 초고를 끝맺는다.
그런 다음 맨 나중에 제목을 단다. 제목은 감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은 피하고, 주제를 암시하는 것으로 짧게 붙인다.
초고를 끝마치면 원고를 넘길 때까지 수없이 퇴고를 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퇴고 과정이다.
자기의 문장을 객관적으로 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서,
초고를 한두 번 훑어본 다음에는 일단 덮어둔다.
그러고 하루나 이틀쯤 지나 다시 냉정한 시각으로
문장을 다듬는데, 여기서 문장을 다듬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민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수식과 비유가 많아
문장이 화려해지거나 가벼운 느낌이 들지 않는가를 살펴보고,
방언이나 비속어는 표준어와 품위 있는 말로 바꾸며,
단어는 맞춤법에 맞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는 플로베르의
말처럼, 그 표현에 꼭 맞는 유일어(唯一語)를 찾으려 애쓰고,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 어색한 표현과
외국어식 문장, 일본말 한자와 조어(造語), 글을 진부하게
만드는 상투어 따위는 뉘를 골라내듯 빼버린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무식한 노파에게 자작시를
들려준 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미련 없이 고쳐 썼다는
]일화가 있듯이, 좀더 쉬운 표현이 없을까를 항상 염두에 둔다.
그리고 문맥의 흐름에 옹이가 되는 낱말은 다른 말로
교체하고, 문장의 호흡과 리듬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여러 번 묵독이나 음독을 한다.
이렇게 서너 번 모니터 상에서 초고를 훑어보고 나서,
세 번 정도 인쇄로 뽑아 본다. 그러면 모니터에서 잡지 못한
문장의 결함이 차분히 드러나게 된다. 이 과정은 전에
원고지에 서너 번 정서하던 작업과 동일한 것이다. 이때 더욱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기 위해 또다시 표현을 다듬고,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없는가를 살펴본다. 또 주제를 흐리게
할 수 있는 군더더기와 주제와 연관이 약한 소재들은
과감히 삭제해버린다. 그러고 나면 초고보다 많이 간략해지고
압축된다. 이렇게 편집자 손에 넘길 때까지 수없이 퇴고를
해도, 나중에 활자화된 것을 보면 미처 잡지 못한 어색한
표현과 정확하지 못한 어휘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내게 이 퇴고 과정은 길고도 지루한 작업이다.
그러나 해도 해도 또한 미흡한 작업이기도 하다. 소동파(蘇東坡)
. 구양수(歐陽脩) . 백낙천과 같은 동양의 문장가나, 플로베르
. 모파상 . 체호프 . 고리키 같은 서양의 문인들도 퇴고를 엄격히
했다고 한다. 좋은 문장을 얻기 위해 문인들은 글을 다듬고 또
다듬지만 마음에 흡족한 문장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은 산문이다. 그래서 나는 철저하게 산문정신에
입각해 수필을 쓴다. 어디까지나 뜻의 전달에 주안점을 두면서,
거기에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한다. 내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화조풍월(花鳥風月)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 중에서도
평범하고 소박하며 또한 음지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내 수필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 인간을
다루는 데 배제시킬 수 없는 것은 시대성이다. 수필도
한 시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산물이니 만큼 거기에는
시대성 즉 사회성이 깃들여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수필에 서정성과 사회성을
접목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나는 처음부터
뚜렷한 주제의식이나 사회의식을 지니고 수필을 쓰되,
그것이 직접적으로 또 강도 높게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한다.
나의 이런 일련의 작업은 수필을 쓰는 사람 역시 확고한 작가의식을
지니고 글을 써야 한다는 내 문학관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도 경계하는 것은, 자기 글에
대한 자만심과 도취다. 도취는 일종의 환각 같은 것이어서,
객관성이 끼여들 자리를 없게 만든다. 자기 글에
객관성을 지니지 못하면, 문장은 발전하기 어렵다. 좋은 수필을
얻기 위해 나는 내 문장에 예리한 메스를 대지만,
유능하면서도 냉철한 의사가 못 돼 번번이 실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그 실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자위와
희망을 걸어본다. 그것은 내 눈이 아주 먼 것은 아니라는
증거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2003. 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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