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신춘(新春) / 피천득

윤소천 2020. 2. 23. 15:41

 

 

 

1월은 기온으로 보면 확실히 겨울의 한 고비다.

쉘리의 ‘겨울이 오면…’이라는 구절(句節)을 바꾸어

‘겨울이 짙었으니 봄이 그리 멀겠는가?’ 이런 말을

해보았더니, 신문사에서는 벌써 ‘신춘에 붙여서’라는 글제를

보내왔다. 1월이 되면 새봄은 온 것이다.

자정이 넘으면 날이 캄캄해도 새벽이 된 거와 같이.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1월은 봄이다. 따듯한 4월, 5월을

어떻게 하느냐고? 봄은 다섯 달이라도 좋다. 우리나라의

봄은 짧은 편이지만, 1월부터 5월까지를

봄이라고 불러도 좋다.

 

봄은 새롭다. 아침같이 새롭다. 새해에는 거울을

들여다볼 때나 사람을 바라다볼 때 늘 웃는 낯을 하겠다.

얼마 전에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문득 들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하는 신선한

웃음소리는 나에게 갑자기 봄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이 이름 모를 여자에게 감사의 뜻을 갖는다. 어떤

남학생이 여학생한테서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내가 여자라면 경제가

허락하는 한 내가 아는 남학생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겠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만약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어 여러

청취자들에게 언제나 봄을 느끼게 하겠다.

 

 인생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성격 파탄자들이라 하며, 또는 신문 3면에는 무서운 사건들이

실린다 하여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소설감이

되고 기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 이른 아침 정동

 거리에는 뺨이 붉은 어린아이들과 하연 칼라를 한 여학생들로

가득찬다. 그들은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

 

봄이 되면 고목에도 찬란한 꽃이 핀다.

‘슬픈 일을 많이 보고, 큰 고생하여도’ 나는 젊었을 때보다

오히려 센티멘탈하지 않다. 바이올린 소리보다 피아노

소리를 좋아하게 되었고, 병든 장미보다 싱싱한 야생 백합을,

신비스러운 모나리자보다는 맨발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골 처녀를 대견하게 여기게 되었다. ‘11월 어느 토요일 오후는

황혼이 되어 가고 있었다’라는 소설 배경을 좋아하던 나는,

‘그들은 이른 아침, 바이올렛빛 또는 분홍빛 새벽 속에서 만났다.

여기에서는 일찍이 그렇게 일어나야 되었기 때문이었다’라는

시간적 배경을 좋아하게 되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담배를 끊어보겠다는 등,

아내에게 좀더 친절하게 하여 주겠다는 등 별별 실행하기

어려운 결심을 곧잘 한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나,

사람을 바라다볼 때나 늘 웃는 낯을 하겠다는 나의 결심은

아마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