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조지 오웰

윤소천 2020. 3. 12. 12:46

 

  

 

 

 

 

 

 

제비보다 먼저, 수선화보다 먼저, 눈풀꽃 보다

그다지 늦지 않게 두꺼비는 다가오는 봄에 나름대로 인사를 한다.

바로 지난 가을부터 웅크리고 있던 땅속 구멍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적당한 물둥덩이로 할 수 있는 한 빨리 

 기어가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두꺼비에게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고 알린다. 땅의 진동같은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지

온도가 몇 도 올라간 탓일 수도 있다. 물론 내내

 자다가 한 해를 놓치는 두꺼비도 간혹 있는 듯하다. 어쨌든

나는 살아 있고 건강해 보이는 두꺼비를 한여름에

땅에서 파낸 적이 한 번 이상 있었다.

 

 

이 무렵이면 오랜 단식을 마친 두꺼비는 사순절이

끝나갈 무렵의 앵글로 가톨릭교도들처럼 대단히 종교적인

인상을 풍긴다. 움직임은 힘이 없지만 절도 있고 몸은

쪼그라든 반면 눈은 기이하게 커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때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사실을 알게 되는데

바로 두꺼비가 살아 있는 그 어느 생명체보다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눈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두꺼비 눈은 금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인장 반지에 가끔 박히는, 아마

금록석이라 불리는 금색 준보석 같다.

 

 

물을 찾아 들어간 뒤 며칠 동안 두꺼비는

작은 곤충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는 데 여념이 없다.

두꺼비는 곧 정상적인 몸집을 되찾고 강렬한 성적

흥분 단계를 거친다. 이 무렵 두꺼비는, 적어도 수컷 두꺼비는,

무언가를 두 팔로 끌어안고 싶다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두꺼비 수컷에게 막대기나 심지어 손가락이라도 내밀면 놀라운

힘으로 꽉 붙드는데 자기가 붙든 것이 암컷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두꺼비 열 마리나 스무 마리가

암수 구별 없이 서로 꼭 매달린 채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덩어리로 물속에서 뒹구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차츰

서로 짝을찾고 수컷이 암컷 등에 적당하게 앉는다.

이쯤 되면 수컷과 암컷을 구분할 수 있다. 수컷은 더 작고

색이 더 진하며 암컷 위에 앉아 암컷의 목을

두 팔로 꼭 부둥켜안는다.

 

 

하루 이틀 뒷면 알 덩어리가 여러 개의 긴 줄을 이루며

갈대 줄기 안팎으로 구불구불 감겨 있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된다.

몇 주가 더 지나면 물은 아주 작은 올챙이 무리로 활기를 띤다.

올챙이들은 매우 빨리 자라 뒷다리가 나오고 앞다리가 나온 뒤

꼬리가 사라진다. 마침내 한여름이 되면 엄지손톱보다

작지만 어느모로 완벽한 새 세대 두꺼비들이 물 밖으로 기어

나오고 게임이 새롭게 시작된다. 내가 두꺼비들이 알 낳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쏙 드는 봄의 현상이기도 하고

종달새와 앵초꽃과는 달리 두꺼비들은 시인들의 후원을 그다지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파충류나 양서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 그리고 봄을

즐기려면 두꺼비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크로커스도 있고 큰개똥지빠귀도 있고 뻐꾸기와 산사나무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누구든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누추한 거리에도 봄은 이런저런 신호를 보낸다.

굴뚝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더 파래지기도 하고 공습

폐허에 나온 한 그루 딱총나무에 생기 있는 초록 싹이

돋기도 한다. 사실 말 그대로 런던 심장부에 자연이 무허가로

계속 존재하는 게 놀랍다. 나는 황조롱이가 뎃퍼드 가스 공장

위로 날아가는 것도 보았고 유스턴 로드에서는 검은 새

한 마리의 일급 공연을 듣기도 했다. 수백만 마리까지는

아니라 해도 틀림없이 수십만 마리 새가 반경 6.4킬로미터

 안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새들이 집세 반 페니도

내지 않고 사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유쾌해진다. 봄에 관한 한

잉글랜드 은행 주변의 좁고 음침한 길도 봄을 막지 못한다.

 

 

봄은 어떤 여과 장치도 통과할 수 있는 신종 독가스처럼

도처에서 슬금슬금 스며든다. 봄을 두고 흔히 "기적"이라고들

말하는데 지난 5,6년 동안 이 닳고 진부한 표현이

새 생명을 얻었다. 근래 들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그런 겨울이

끝난 뒤 찾아오는 봄은 진짜 기적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봄이 정말 오리라고 믿기가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1940년부터 해마다 이월이면 나는 이번에는

겨울이 영영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꺼비처럼 페르세포네도 늘 거의 같은 시기에 소생했다.

 

 

삼월 말쯤 되면 내가 사는, 퇴락해가는 빈민굴이

기적처럼 갑자기 달라진다. 광장에 서 있는, 그을음 묻은

쥐똥나무들이 연두색으로 변하고, 밤나무 이파리들이

무성해진다. 수선화가 얼굴을 내밀고 꽃무가 봉오리를 맺고

경찰관의 튜닉 제복이 유쾌한 파란빛을 띠고 생선 장수들이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포근한

 공기 속에서 지난 구월 이래 처음으로 용감하게 목욕을

참새마저도 색깔이 달라 보인다. 봄을 비롯한 계절의

변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일이 위험한가? 더 정확히 말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족쇄에 묶여 신음하거나,

어쨌든 신음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래하는 검은 새나 노랗게

물든 시월의 느릅나무처럼 돈 한 푼 들지 않을 뿐더러

좌파 신문 편집장들이 계급 관점이나 부를 만한 게 없는

자연 현상 덕택에 삶이 종종 살만하다고 말한다며 정치적으로

비난 받을 일인가? 분명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내가 기사에게 "자연"을 호의적으로

언급하기만 해도 비난 편지가 날아온다.

 

 

대개 이런 편지들의 키워드는 내 글이 "감상적"이라는

것이지만 두 가지 생각이 섞여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실제 삶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그게 무엇이든 일종의 정치적 침묵을

조장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이런 생각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워야 하며 우리의 임무는 우리가 느끼는 결핍은

배가시키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늘리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 기계의 시대가

닥쳤으므로 기계를 싫어하거나 심지어 기계의 지배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퇴보적·반동적이며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 뒤에는 자연이 진짜 무엇인지 모르는 도시

사람이나 괴상한 취미로 자연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그러니까 실제로 흙과 씨름해야 하는 사람은 흙을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새나 꽃에 대해서는 순전히 실용적인 관점에서나

아니면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시골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도시에 살아야 하며 따뜻한 계절에 이따금 주말 산보나

다녀야 한다. 이런 생각은 누가 봐도 틀렸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발라드를 비롯한 중세 문학은

조지 시대 시인들 못지않은 열정적인 자연 예찬으로 가득하며

중국이나 일본 같은 농경민족의 예술도 나무와

, , , 산을 주로 다룬다. 삶의 즐거움이 정치적 침묵을

조장한다는 생각은 더 미묘하게 잘못됐다. 분명 우리는

현실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어려운 상황을 최대한 즐기려고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즐거움을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돌아오는 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노동의 절감된 유토피아에서

행복할 이유가 있을까? 그 사람은 기계 덕택에 생긴 여가

시간에 무얼 할까? 우리가 고심하는 정치 사회 문제들이 정말

해결된다면 삶이 더 복잡해지지 않고 더 단순해지지 않을까 싶다.

첫 앵초꽃을 보고 느끼는 즐거움이 월리처 주크박스의 노래를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보다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나무와 물고기, 나비

그리고 - 내가 처음 든 사례로 돌아가서- 두꺼비 같은 것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미래가

 조금 더 가능해질 것이며, 강철과 콘크리트만 떠받들라고

가르친다면 우리 인류는 남아도는 에너지를 서로 증오하고

지도자를 숭배하는 일에 쏟아 붓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어쨌든 이곳 런던 N.1 우편구역에도 봄이 왔다. 그리고 우리가

봄을 즐기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두꺼비들이 짝짓기를 하거나, 산토끼들이

어린 옥수수 밭에서 권투 시합을 벌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내가 봄을 즐기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막으려들 만한

모든 중요 인사들을 떠올려 본 적이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다행히 그들은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진짜 아프거나

굶주리거나 겁에 질리거나 감옥이나 휴가 캠프지에 갇혀 있지

않는 한 봄은 여전히 봄이다. 공장에는 원자폭탄이 쌓여가고

리에는 경찰들이 어슬렁대고 확성기에서는 거짓말이 쏟아져

나와도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돈다. 독재자도 관료도

이런 변화가 제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결코 막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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