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연꽃의 바람기 / 구활

윤소천 2019. 9. 5. 18:12

 

 

 

 

 

다산이 젊었을 적 이야기다. 정조 임금 밑에서

일하던 시절, 또래 친구들을 규합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그 모임은 풍류를 실현해보고자

하는 약간은 고급스러운 상류층의 계추 형식이었다. 살구꽃

피면 모임을 갖는다. 복숭아꽃이 피면 봄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인다. 여름 참외가 익으면 다시 만난다. 서늘해지면

연꽃을 완상하기 위해 또 모인다. 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면 만나고 큰 눈이 내리면 다시 모인다. 한 해가 기울 무렵

매화가 눈 속에서 꽃망울을 터트리면 모두 모인다. 한 해에

일곱 번 만나는 것이 그들의 모임 규칙이었다.

 

 

이렇게 운치 있는 만남이 또 있으랴. 참으로

아름다운 모임이다. 죽란시사 열다섯 벗들이 모일 때는

붓과 벼루 그리고 안주를 갖춰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시를 지었다. 비정기 모임도 더러 열린다. 아들을 

낳으면 으레 모이고 벼슬이 높아지면 축하하기 위해

모인다. 회원 중 수령으로 나가는 이가 있으면 만나고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면 그 집에서 잔치를 벌인다.

사실 풍류라는 건 별것 아니다. 예쁜 꽃을 보고 즐기며

맛있는 과일을 먹으면서 기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로 눈이 호사하고 귀가 즐거워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 가운데 시를 읊으며 때론

풍악을 울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풍류객은 탐미주의자라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풍류는 게으른 사람은

즐길 수없는 영물이다.

 

 

다산이 스물아홉 살 때 세검정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 구경을 하러 적이 있다. 그는 명례방에 있는 자택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자 폭포 구경을

제안한다. '못 가는 사람은 벌주 열 병'이란 벌칙을 매기자

모두가 따라 나섰다. 지금의 명동에서 세검정까지는

빗속에 말을 타고 달려도 꽤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아무도

마다 않고 소낙비를 맞으며 폭포 구경을 나선 것은 비가

멎어버리면 급류를 타고 내려가는 물줄기가 금세 자지러지기 

때문이다. 정자에 올라 술상을 차리고 굉음의 폭포소리를

들으며 시 한 수씩을 지었다. 비가 그치자마자 석양의 얕은

햇살이 물 묻은 나뭇잎 사이로 비쳐왔고 수목들은

한결 싱그러운 기운으로 잎새를 흔들었다.

 

 

죽란 회원들은 연꽃 필 때 들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가을이 오기 전에 서대문 옆 서련지西蓮地 연못가에 조각배를

띄워두었다. 연꽃은 해 돋기 전 이른 새벽부터 피기 때문에

어둠을 뚫고 말을 달려와야 겨우 한두 번 꽃잎을 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때론 혼자서 어떤 때는 둘이서 조각배를

타고 연못 속으로 들어가 앙다물고 있는 꽃잎 옆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드디어 '부욱' 하면서 꽃잎이 열리는 들릴 듯 말 듯한

그 순간의 청개화성은 소리가 빚어내는 최고의 오르가슴이다.

풍류의 절정, 아니 그 이상. 다산과 그의 친구들은 폭포소리와

연꽃 벙그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로지 풍류만 즐겼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빗소리가 그친 후 자지러지는

물소리를 듣고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며 새벽을

기다려 만난 연꽃의 꽃핌을 보고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인무십일호人無十日好란 옛말을 상기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산은 "감히 놀고 즐기느라 거칠고 방탕하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좌우명을 보이지 않는 글씨로 새겨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후학들에게는

신하로서 '보위에 오른 군자가 안전하게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연구했을 것이다.

 

 

연꽃은 무언의 교훈으로 많은 것을 가르친다.

송나라 때 선비 주돈이는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비고 밖이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도 없다."한 마디로 뭇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있다. 다산에게 무엇 하나라도 배우기 위해 해마다

 연꽃이 필 무렵이면 연지 순례에 나서곤 한다.

올해는 이른 철에 부여 궁남지에 들렀다가 꽃을 보지

못했으며 만발할 즈음에 함양 상림의 연밭에 들러

짙은 연향에 취해보았다. 내 앞의 아주머니들이 똑똑하지

못한 발음으로 "홍년이나 백련뿐인 줄 알제, 요즘 세상에는

잡년이 더 많데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걸어간다.

홍백의 교잡종이 잡련雜蓮이란 얘기였다. 그녀들의 수다

속에도 배울 게 있었다. 연꽃이 잡질을 하면

잡련이 된다는, 그러면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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