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빗소리 / 정목일

윤소천 2019. 9. 10. 08:55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섬돌 앞의 땅이 젖는다. 나무들이 젖고 산이 젖는다. 아파트에서

생활해온 지가 20년쯤이나 돼 비의 음향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양철 지붕에 토닥토닥 부딪치는 소리 속엔 잊어버렸던

말들이 웅얼웅얼 소곤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비속에선

세상도 젖지만, 말들도 젖어서 촉촉이 마음속으로 배어든다.

어릴 때, 나는 양철집에 살았다. 여름에 좀 무덥긴

했으나, 비가 오면 빗소릴 듣는 것이 좋았다. 콩을 볶듯 지붕에서

경쾌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좋았다. 빗소리는

점차 안으로 젖어들어 아득해지고 먼 태고의 공간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물이 흘러가는 소리….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젖어, 공감의 물기를 느끼게 했다.

빗소리는 편지글 읽는 소리처럼, 어떤 때는 친구의 얘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모든 것이 닿아있었다. 산, 나뭇잎새, 곤충들의 더듬이,

엉겅퀴꽃의 가시, 어머니의 한숨, 언제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버릴지 모를 아버지의 얼굴도 닿아 있었다. 이 세상에

누구와도 먼 거리에 있는 듯한 소외감을 느꼈던 나는 비가 오면

모두가 낯선 것처럼 돌아서 있는 것이 아니라, 친근하게

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빗소리는 위로의 말들을 속삭여주며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외톨박이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과 닿아 함께 숨 쉬고 마음을

통하는존재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빗물이 불어 오래간만에

물이 넘친 늠름한 모습이 좋아 강물을 보러 갔다. 빗소리와 물과

 세상이 서로 닿아 있음을 보았다. 나도 강물처럼 흘러 미지의

세계로 떠내려가길 바라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까마득히 빗소릴

잊어버렸다. 생활 속에서 비의 음향과 비의 촉감이 사라져갔다.

 

비를 맞으며 걸어본 일도 없어졌다. 비를 피하고자

나무 밑에 서서 나무와 함께 비를 맞아본 기억도 어슴푸레하다.

봄비가 나무들에 귀엣말로 하는 소릴 엿들어본 지도 오래되었다.

빗소리에 묻어오는 신록의 향기와 강물의 음성도 잊어버렸다.

빗소리를 상실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 삶과 인생에 생명의

물기가 말라버린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가슴에 토닥토닥

부딪치며 간지럽고 싱그러운 말을 해주던

물방울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비가 내려도 빗소릴 듣지 못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시멘트 공간에 살면서부터 빗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마음의 문이 닫혀서 자연과 교감하지

 못하고 외톨박이가 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외톨박이가 된 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우둔하기만 하다.

농촌의 친지 집에 와서 오랜만에 빗소리를 듣는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전의 이야기를 듣는 듯 다정스럽다. 풀꽃

향기가 나고, 그리운 이의 음성이 들려온다. 산천이

사람을 낳고 기른다는 말이 있지만, 산천은 비가 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산천을 먹이고 목욕시키고 기른 것은 아무래도

비일 듯싶다. 빗소리는 그냥 어떤 소리인 게

아니고, 생명음인 게 분명하다.

 

 

처마 끝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섬돌 앞의 땅이 젖는다.

나도 하나의 빗방울이다. 내 빗방울 소리를 누가 듣고 있을까.

빗방울은 어느 물체이건 다가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닫혔던 침묵의 문에 내려서 대화의 빗장을 살그머니 풀어놓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열어 비를

맞아들이고 있다. 메마른 마음에 고랑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싶다. 나도 어느 풀숲에 가서 풀꽃을 피우는 생명의

수액이 돼야 할 텐데…. 빗소리가 내 가슴에 피아노 음향을

내며 튀어오르고 있다. 나는 물기가 없어 씨앗 하나 자랄 수

없는 딱딱하고 황폐한 땅이 아니었던가. 사막을 안고

숲을 상상해온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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