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맨 먼저 스카웃한 직원 / 윤 학

윤소천 2016. 8. 12. 10:35

 

 

 

 

나에겐 이상한 고집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길보다는 내가 가야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는 버릇

같은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직원을 뽑을 때도 그 고집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새내기 변호사라 반드시

경험 많은 사무장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법원, 경찰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은 사무장이 인맥도 있어서 사건수임에도 유리하고

업무처리도 잘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선배나 동기들의 사무실에

가보면 연배 지긋한 사무장이 앉아 있었고 고객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법의 울타리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딱딱한

표정에 웃는 얼굴을 찾아보기 힘든지... 온몸에서 뭔지 모를 위압감이

풍겨 나오는 그들과 엘리베이터라도 같이 탈 때면 나도 저런

사람인지 몰라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그래서 함께

일할 직원들만이라도 늘 웃는 얼굴에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했다.

다행히 밝고 상냥한 여직원과 법대를 갓 졸업한 남자직원을 채용했는데

어찌나 겸손하고 친절한지... 손님들도 찡그린 얼굴로 법률사무소에

왔다가 곧 편안해지곤 했다. 사건을 유치해올 능력은 없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그들 덕분에 나는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변호사 일에

집중할 수 있어 경험 많은 사무장이 없어도 손님들은 늘어갔다.

 

가끔씩 노련한 사무장들이 판검사들과 골프도 치고 술자리도

가야 손님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며 조언을 하곤 했다. 골프나

술자리 할 시간에 소송을 더 열심히 준비할 수 있어 승소율이

높아 수입도 더 많고 몸과 마음도 편하다고 내 경험을 들려주면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사무실을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내 고집대로 경력 없는 직원들과 20

년간 일했고 그 결정에 늘 만족스러웠다. <가톨릭다이제스트>

맡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출판경력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조언을 했다.

 

잡지는 광고가 생명입니다. 광고를 받지 못하면 망하고 맙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피곤했다. 잡지의 생명은 좋은 글을 싣는

것이지 왜 광고가 생명이 되어야 하는가? 변호사의 생명은 성실한

변론인데도 마치 판검사와의 친분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말하던 사람들과

어쩌면 그렇게 말투와 표정까지 닮았는지... 본말이 뒤바뀐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말하는 사람들과는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함께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맨 먼저 스카웃한 직원은 집에서 밥 짓고 아이만 길렀던

아내였다. 아내는 좋은 글을 독자들이 재미있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만 열정을 쏟았다. 매달 천여만 원씩 적자가

나는데도 걱정 한마디 없이 태연했다. 그런데 문제는 표지 디자인은

어떻게 하는지, 어디서 인쇄하면 좋은지 나도 아내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글 편집은 다 마쳤는데 막상 잡지를 내야할

마감일이 다가오자 막막하기만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우려고 나갔다가

아이 친구 엄마를 만났는데 그날따라 그녀가 출판사를 다녔었다는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몹시 반가워하며 사정 얘길 했더니

책 만드는 법도 알려주고 디자인 회사와 인쇄소에도 함께 가주었다.

얼마 후 흑산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갓 올라온

아가씨를 직원으로 뽑아 소소한 일을 돕도록 했는데 그 아이가 어찌나

맑은지 사무실이 밝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 달 마감일이 어찌나

금방 돌아오는지 새벽녘까지 일해도 하루하루가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늘 쫒기는 심정이었다. 대졸 신입사원을 뽑았지만 일이 더디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한 선배가 십수년간 일간신문과 유명 일간지에서

교정을 보았던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그에게 교정을 맡겨봤더니

일을 아주 깔끔하게 빨리 해냈다. 역시 경력자라 다르다고 생각하여 그를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런데 그 직원이 들어오고 나서 독자들로부터

글이 무미건조해졌다는 불평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 교정을

보면서 사실관계를 이성적으로만 정리하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사람의

품격이나 영적인 호흡이 느껴지는 중요한 구절들은 가차 없이

들어내 버린 것이다. 그런 구절들을 오히려 더 살려내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해줘도 오랫동안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익힌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를 보며 형식의 틀에 갇혔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진실한 것, 선한 것, 더 아름다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진정 유익한 일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들과 해내야겠다는 확신을 더 굳게 갖게 된 사건이었다.

그 후 나의 고집은 더 확고해져 직원을 뽑을 때도 당장 도움이 되는

사람보다 아직 별 능력이 없어도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뽑기로 했다. 그런데 소위 일류 대학, 대학원을 나왔다면서도

초등학교 과정만 잘 배우면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을 해내지

못했다. 글을 읽고 느낀 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겨우 어디서 들은

내용만 그럴싸하게 늘어놓을 뿐 자기 생각을

가진 젊은이가 드물었다.

 

생각 없이 남이 만들어 놓은 틀만 암기해온 사람들과

영과 혼을 담아야할 가톨릭 잡지를 만들 수는 없었다. 우리 학교교육,

가정교육에 원망만 커갔다. 그런데 몇 년 전 지방에서 올라온 순박한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에게 오랜 독자인 

어머니가 <가톨릭다이제스트>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녀도 어려서부터 <가톨릭다이제스트>보아왔던 터라 얼마나 소중한

책인지 잘 안다며 편집 일을 즐겁게 했다.

 

그 후 한 명 한 명 가슴으로 말을 알아듣는 반듯반듯한 직원들이

입사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부모들이 다 오랜 독자였다. 그들은 아직

어려도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제 20명도

넘는 직원들이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 한 명 한명이 오랜

독자였거나 오랜 독자의 자녀들이다. 예전에는 내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는 직원이 한 명이 없어 외로웠는데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직원들이 척척 알아듣는다.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설 대면 마치 천국인 듯

행복하다. 직원들도 그렇다고 입을 모은다.

 

딱딱한 경제학과, 법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회계학과, 지리교육과를

나왔지만 책을 좋아하고 문학적 소양이 있는 직원들. 성악과, 미술사학과,

피아노과,무용과를 졸업했지만 예술인입네하며 겉멋 부리지 않고

진실하게 예술을 사랑하는 직원들이 있어 나는 이제 무슨 일이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 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부인이 국문과 나왔죠?”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아서 더 맑고 신선한 책을 만들고 있다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삶을 늘 꿈꾸어 왔는데... 맑고

순수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주시는가 보다.

 

( 가톨릭 다이제스트, 2016.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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