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옳은 길을 가면서
뽐내지 않는 사람. 오해를 받더라도 옳은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을...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맑고 그윽한 눈으로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오해 받기 싫어하고
인정받기만 원했으며 옳은 길보다는 편한 길을 택했다.
그래도 나는 그 황홀한 만남의 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20여 년 전 대학교수 한 분이 찾아왔다. 그는 가톨릭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문제점과 나아갈 길을 열변하는 그의
눈은 빛났다. 나는 그분을 집으로 모셔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다.
혼자만 듣기 아까워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가 보내온 글을 본
순간 답답해졌다. 난해한 단어들이 가득한 데다 문장도 복잡해
몇 번을 읽어도 그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런 글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게 하나...’ 몹시 실망했지만 그의 진지한 눈을
떠올리며 나는 글을 고쳐보기로 했다.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며
문장 하나하나를 바꾸어갔다. 그의 원고가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졌을
때는 동이 터오기 시작했고 내 가슴엔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그에게 고쳐진 글을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다’면서 몹시 기뻐할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그의 글을 고쳤다는 사실로 그가 자존심 상해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나는 직원에게 내가 직접 고쳤다는 말은 하지
말고 글을 보내라고 했다. 편집실에서 여러 직원들이 고친 글이라고
생각하면 그의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대대적으로 고쳐진 글에 대해서는 고생했겠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겨우 단어 몇 개 바꿔 보내면서 왜 그걸 바꿨는지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의 권위적인 편지에 몹시 놀랐다. 그래도 독자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그 글을 실었는데
예상대로 반응이 좋았다. 그 교수에게도 잘 읽었다고 전화가 수없이
간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나는 그가 글을 보내오면 단어 사이사이에
숨겨진 뜻을 퍼즐 맞추듯 살려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여 책에
실었다. 그렇게 몇 차례 글이 나가고 얼마 후 그는 단어 하나를 달리
바꾸었으면 더 좋았겠다면서 마치 편집실에서 자신의 완벽한 글을
나쁘게 만든 것처럼 나무라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우울했다. 남의
노고에 느낌조차 없는 그가 가톨릭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일까.
몇 년 전 공직에 있던 어떤 분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옳은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꿋꿋이 나서는 그분의 인품도 나를 설레게
했다. 그동안 나는 월간지를 만드는 것만도 힘에 부쳐 누가 책을
출판해 달라고 해도 그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분의 글은
책으로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그것은 그분에게도 나에게도 세상에도
축제가 될 일이니까. 나는 그 축제가 더욱 빛나도록 그분의 글
하나하나를 다듬어 나갔다. 워낙 진실한 마음이 담긴 글이어서
고치는데도 신이 났다.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빛이 나는 글을 고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뒷 문장을 앞으로 올리고 앞 문장을 뒤로
내리고, 단어도 바꿔보고 중복된 말은 삭제하고, 문장을 더 간결하게
하기도 하고, 그 느낌이 더 잘 전달되도록 늘이기도 했다.
그런데 잘 쓴 글을 더 좋게 만드는 데에는 더 큰 수고가 필요했다.
60점 맞다가 80점으로 올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90점에서
99점으로 올리기는 훨씬 더 힘든 것처럼... 몇 시간을 꼬박 앉아 글을
다듬고 나면 허리를 펼 수 없을 만큼 힘들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람들은 편하게 읽히는 글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렇게 정성을 들인 후에도 나는 더 나은 글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닐까 인쇄 직전까지 고민하면서 글을 숙성시키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그분이 언젠가부터 나는 뒷짐이나 지고 다니며 직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사람처럼 대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분에게도 내가 고쳤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글 편집 능력은 아직 부족하지만 사람을
기분 좋게 잘 대하는 직원에게 이런저런 연락을 하게했다. 그분은 자신의
책을 내는 데 그 직원이 대부분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의 정성을 제대로 보아내려는 사랑이 있다면 글을 고친 사람의 체취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아, 사람은 진실보다 눈에 보이는 사실에
더 약하구나! 그분은 메일을 주고받던 편집실 직원과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출판인과 저자의 만남처럼 화기애애했다. 그 직원을
보면서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달콤함을 이기기가 우리에겐
가장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역할 이상으로 평가받을
때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양심이 있다면 서로에게 기쁨이
될 텐데... 뭔지 모를 섭섭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변호사로
한참 활동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의뢰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밤을 새워 준비서면을
쓰고, 다음 날 기진맥진하여 직원에게 의뢰인을 불러 사실과
다름이없는지 확인하게 한 뒤 제출하라고 지시하곤 했다. 그런데
의뢰인은 자신과 마주한 그 직원이 그 골치 아픈 문서를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아는지, 얼마나 수고가 많았냐고 깍듯이 대하고
밥까지 사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에게는 뭘 했냐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대했다.
직원들 역시 마치 자기가 문서를 작성하기라도 한 것 마냥
은근슬쩍 넘어가곤 했다. 이런 걸 일일이 말하기는 묘하게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나 이상의 평가를 받을 때
매번 바로 잡는 양심이 있는가? 어쩌면 나도 내가 그분을 위해 할 만큼
했다는 자만심에서 내 역할 이상으로 그분이 알아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분도 ‘내가 원래 글을 잘 써놓았으니까
그렇게 품격 있는 글로 고칠 수 있었지’하며 자신에게만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그분 한 사람만이라도 상대방의 역할에
감사함이 더 컸더라면 우리는 진정한 축제를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오해받으면서도, 손해 보면서도 내 노력을 알아봐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옳은 길로 가려는 마음을 나부터 굳건히 하고 싶다.
이제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내가 그런
나를 만나게 된다면 나에게 그보다 더 큰 축제가 있을까.
( 가톨릭 다이제스트 . 2016.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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