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상추쌈이다. 오뉴월 텃밭에서 우둑우둑 뜯어다가
생물에 헹궈낸 상추잎을 몇 잎씩 포개 놓고 찬밥 한 술에 된장,
풋고추를 툭 부질러 얹어 아귀 미어지게 눈 부릅뜨며 움질움질
씹는 그 삽상한 맛이야! 요즘 세상에 그 흔한 로스구이 고깃점을,
드레스같이 넓은 온상재배 상추잎에 감아 먹는 브르조아의
맛과도 다른 쌉싸래함이 곁들인 텃밭 상추의 맛! 여름 낮에 밭을
매던 할머니가 목화밭 고랑에서 뽑아 온 연한 열무 잎을 쌈해
먹는 푸성귀 맛도 거기에 버금가게 상큼한 맛이다.
한국의 수필은 떫지가 않다. 몽테뉴의 수필은 우리에게 위압감을
주고, 찰스 램의 그것은 우리를 당혹하게도 하지만, 김진섭의 수필은
우리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린위탕(林語堂)이 사색과 유머의
중간에선 변설(辨舌)이었다면, 이양하는 사색의 알갱이를 싱싱한
신록의 정취 속에 싸서 상추쌈 같은 입맛으로 맛보게 한다. 수필은
또 매운탕 맛이다. 얼큰하면서도 톡 쏘고 뜨거우면서도 시원한
민물고기 매운탕. 그 맛이 주는 개운함이 있다. 마늘과 생강을 잘
다진 양념에 고추장을 풀고 센 불에 팔팔 끓이는 매운탕 냄비에서
솟는 훈감스러운 냄새가 수필가의 몸에서 난다.
한국의 수필이 신변잡기에 편향되었다고 경시하는 분네도
많지만, 무거운 글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란 얼마나 빽빽하고 음울할
것인가. 순박한 자기 고백으로 엮어진 한 편의 수필을 우리가
부담 없이 읽었을 때, 비록 그 사람을 만나본 일은 없어도 그이는
이미 내 다정한 이웃 아저씨요 내 사촌이며, 시집간 언니를 끔찍이도
위해주는 우리 형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의 솔직한 고백은 나의
치부(恥部)일 수도 있고, 그의 단란한 가정 얘기는 지금의 우리집
아니면 내가 꿈꾸는 행복의 일루(一縷)를 보는 듯하기도 하는 것이다.
수필은 잔정 많은 맏형수의 눈길이요 손길이다. 소설처럼 진진한
의무감도 없으면서 어머니같이 자상하고, 시처럼 상긋하지도
않으면서 문득 문득 연인을 느끼게 하는 눈길이다. 수필은
대잎파리를 스치고 가는 바람 소리다. ‘맛’과 ‘멋’이 정서의 공통
감정이라고 한다면, 나는 감히 이 대바람 소리의 청각적인 멋을
수필의 맛이라 하고 싶다. 오동잎을 후두기는 가을밤의 빗소리가
시이고, 너저분한 골목길 옆 시커먼 도랑을 쓸어가는 세찬 빗줄기가
소설이라면, 여름날 초저녁 댓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는
한 편의 산뜻한 수필이다.
누가 수필을 반쪽 문학, 얼치기 문학이라고 하는가? 산에 가면
정정한 교목만이 나무가 아니요, 벼랑 위 바위틈에 구부러져 서 있는
소나무도 멋진 나무이며, 진달래, 철쭉 같은 관목들도 그대로 값진
나무이다. 한국사람 중에 상추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요즘같이 계절에 관계없이 무시로 싸서들 먹는 자연식의 시대에
있어서랴. 수필은 팡팡히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가랑잎을 띄우고
찰찰 흘러가는 맑은 개울이다. 힘겨운 인생을 걸어가면서 굽이굽이
흐르는 그 개울물에 피곤한 발을 담글 때의 상쾌한 맛. 멈추지
않고 솟아나는 옹달샘에서 샘물을 바가지로 퍼마셨을 때,
목젖까지 시려오는 시원한 그 맛이다.
수필은 소금구이 생선 맛이다. 전라도 고흥 녹동항에 가면
딱돔이라는 붉고 작은 돔이 있다. 선창 음식점에서 식사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면 이놈의 굽는 냄새가 먼저 콧속을 후벼든다.
감성돔처럼 크지도 흐벅지지도 않지만 그 맛이 일품이다. 대가리
부분이 너무 크고 가시도 엉성해서 젓가락을 대고 뜯어 먹을 것은
없지만 소금을 발라 구워진 그 한 점의 맛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이 소금구이 딱돔의 딱 한 점 맛이 온갖 생선을 대표하는
맛일거라고 생각하며 수필의 맛이 정녕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문득 회상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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