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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야를 달리는 말 / 김훈

윤소천 2015. 5. 11. 07:20

광야를 달리는 말   /  김훈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언 땅이 곡괭이를 튕겨내서, 모닥불을 질러서 땅을 녹이고 파내려갔다.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육군에서 갓 제대한 무직자였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너 이러지 말고 나가서 놀아라. 좀 놀다가 부대에 들어가야지.”

아버지는 장작처럼 마른 팔다리를 뒤척이면서 말했다.

 

   땅을 파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런 울음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들을 꾸짖어 단속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나는 가부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라는 호칭은 지금도 나에게 두렵고 버겁다. 나는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내 여동생들은 나를 ‘작은오빠’라고 부른다. 이, ‘작은오빠’라는 호칭은 여전히 나를 목메게 한다.

 

   지금은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성묘 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다들 나이

먹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 그는

장강대하(長江大河)와도 같은 억겁의 술을 마셨다. 그는 1940년대의 상해와 중경에서 마셨고, 1950년대의 서울과 피난지 부산에서 마셨다. 그는 만주에서 마셨고, 식민지의 국경선에서 마셨고,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명동에서 마셨다.

 

   그는 이승만 정권, 장면 정권, 윤보선 정권을 향해 활화산과도 같은 저주를 품어냈다. 폐지 수집하듯이 매절원고를 몰아가서 원고료를 잘라먹는 출판업자들과, 외상값을 독촉하는 술집주인들, 호적초본을 떼어주면서 턱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구청직원들과, 껌을 씹으며 병실에 들어오는 간호원들을 그는 이를 갈며 증오했다.

 

   그는 문협이사장 선거와 예총회장 선거를 증오했고, 신문 연재소설이나 대학 선생자리를 얻으려고 쇠고기 몇 근을 사 들고 권력자를 찾아다니는 자들의 가엾은 몰골을 연민했으며, 소인 잡배 들끓는 한국문단을 버러지처럼 경멸했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어 번씩만 집에 다녀갔다. 아버지가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했고, 묻지 못했다. 아버지가 오시는 새벽에 나는 주전자를 들고 시장에 가서 해장국을 사다 드렸고, 아버지가 누운 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땠다. 아버지는 늘 예고 없이 오셨기 때문에, 차가운

구들을 덥히려면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야 했다.

아버지는 잠들지 못하시는지, 방 안에서는 쿨룩쿨룩 기침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기침소리는 몸속의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듯이 거칠고 깊었다. 기침소리에, 몸속이 무너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버지의 방 아궁이에 장작을 때면서 나는 오직 아버지의 기침이 멎기만을 빌었다.

 

   불 때기를 마치고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서 요 밑에 손을 넣어보면 방바닥은 그제야 온기가 돌았다. 아버지는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버지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몸과 마음이 모두 잠들어서 아버지가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이 세상을 괴로워하지 않는 그 짧은 동안을 감사했고 안도했다.

   대낮이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나를 불러서 천자문을 써보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글자를 부르면 내가 받아썼다. 내가 글자 몇 개를 받아쓰지 못하자 아버지는 “진서를 배워라. 언문으로는 안 돼.” 한마디를 남기고 또 어디론지 나갔다. 우리는 아버지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우리가 셋방에서 셋방으로 이사를 할 때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이사 간 집을 알지 못했다. 며칠 뒤 아버지는 복덕방에 우리들이 이사 온 집을 물어서 찾아오곤 했다. 이사 온 집을 한번 돌아보고 나서, 아버지는 우리를 야단쳤다.

"너희는 배산임수를 모르느냐?"

아아, 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흐르는 물을 앞에 두르는 낙원에, 아버지와 우리는 한 번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배산임수를 타박하는 아버지의 말은 우리를 야단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의 그리움을 토로하는 말처럼 들렸다.

  

   중학교 때 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소설에 빠져 있었다. 학원사에서 나온 청소년용 문고판이었는데, 겉표지는 노란색이었고 삽화가 들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중에서도 허클베리는 톰소여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허클베리는 공부 못하고 집구석은 가난하고 싸움 잘하고 말썽만 부리는 불량청소년이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동경을 실천할 수 있는 결단성과 행동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허클베리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사내였다.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아들한테 맹세해놓고서 그 다음 날 대낮부터 또 마시는 사내였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아버지가 허클베리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1학년 때던가. 천지분간 못하는 나는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네 아버지 같아요."

그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내 말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또 말했다.

"내 말이 어려우냐?"

 

 아버지에게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이미 없다는 것은 나는 좀더 자라서 알았다.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이 없는 시대의 황무지를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쓰신 무협소설이 좀 팔려서 돈이 생기던 시절, 장안의 술값을 혼자서 다 내고

다녔다. 어머니의 명령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거리에 나갔다가 술집에서 아버지를 만난 적도 있었다.

   홀 전체의 술값을 다 내더니, 종업원을 불러서 "야, 2층은 얼마나?" 물어서 2층 술값까지 다 냈다. 1층이고 2층이고 간에, 그 술집에 모인 술꾼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친구였고 선배거나 후배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좀 저래보나---' 하면서 부러워했던 적도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엾은 광야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수발을 들면서 한 생애를 보낸 아버지는, 그의 스승이며 등대였던

김구의 기일이 되면 효창공원 묘소에 가서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땅에 쓰러져 "선생님, 선생님"을

부르며 새벽까지 울었다.

   79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 푼씩 주고 돌아갔다.

 

   나는 고등학교 때 담배를 배웠다. 다른 아이들이 궐련을 피울 때, 나는 아버지의 파이프를 훔쳐서 피웠다. 학교에서 파이프를 피우다가 선생님한테 빼앗기고 벌을 섰다. 다음날 아버지가 학교에 와서 빼앗긴 파이프를 받아냈다. 아버지는 그 파이프를 나에게 돌려주셨다.

"너 가져라. 학교에는 가져가지 마라. 너, 담배 줄여."

   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았고 가정적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거칠었으며 늘 울분에 차

있었다. 아버지에게 공야란 없었다. 아버지는 그 불모한 시대의 황무지에 인간의 울분과 열정을 뿌리고 갔다. 나는 언제나 그런 아버지의 편이었다. 내가 너무 아버지 편을 들어서 늙은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사내놈들은 다 한통속이야."

   어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육신도

이제는 풍화가 끝나서 편안할 것이다. 아버지 죄업과 아버지의 방황과 아버지의 울분도 이제는 다

풍화되었을 터이다. 지난 한식 때 새로 심은 잔디가 잘 퍼져 있다.

 

 

출처 : 정호경의 수필마을
글쓴이 : 이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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