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게시판

[스크랩] 지하 형 미안해/최인호

윤소천 2015. 5. 11. 07:21

지하 형, 미안해

 

 

최인호

 

 

 

며칠전 원주에 들렀다가 대학 선배들과 함께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댁에 들른 적이 있었다. 오래전 박경리

선생님은 원주로 낙향하여 텃밭을 일구고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잡지에서 신문에서 전해듣고 있었는데, 우연히 선생님댁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문단에 데뷔한 지 햇수로 25년째 되어가는데도 나는 한번도

박경리 선생님을 만나뵌 적이 없다.

연세대학의 교수로 있는 대학 선배들이 길잡이를 하였는데, 생전 처음 만나뵈면서 빈손으로 찾아뵙는 것이 어색해서 간단한 선물이라도 하자고 하였더니 대뜸 정현기 교수가 집앞 가게에서 라면을 한 박스 사라는 것이었다. 박 선생님이 유난히 라면을 좋아하니 그게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처음 뵙는 문단 대선배에게 라면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라면 한 박스를 사들고 찾아간 박 선생님댁은 한밤중이어서 그저 캄캄하였다. 대문도 없는 집앞에서부터 언덕을 올라 문앞에 이르기까지 계속 캄캄하고 캄캄하였다. 빈터를 지키기에는 초라한 삽살개 같은 땅꼬마 개 한 마리만 '컹컹컹컹'짖고 있을 뿐이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하고 소리를 질러 문안인사를 하고 어두운 응접실로 들어가니 참으로 반가운 얼굴

하나가 중세 유럽의 고성에서 호롱불을 들고 나타나는 성주처럼 문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김지하

형의 얼굴이었다. 순간 나는 지하 형이 이집에 웬일일까 생각하였다가 ', 그렇지! 지하 형이 박 선생님의

사위지'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런 의미로 보면 박 선생님의 외동딸이자 지하 형의 부인도 나하고는 초면이 아니다. 대학 4년 동안 나와

함께 연세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던 클래스메이트였다. 그분은 사학과였고 나는 영문학과여서 과도 다르고,

중간에 나는 낙제를 하고 군대에 입대하느라 학년이 뒤바뀌고 말았지만 이십대 초반 그 아가씨는 같은 교정에서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를 함께 하였던 동기생이었다.

그 당시 박경리 선생님은 <김 약국의 딸들>이란 소설이 초베스트셀러가 되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분의

따님이 중세식의 긴 치마에 중세식의 긴 머리카락에 늘 화사하지 않고 수수한 빛깔의 옷차림을 하고, 무엇이 그리도 바쁘고 수줍은지 옹기종기 학생들이 모여앉은 잔디밭을 도망치듯 종종걸음으로 다니는 것을 보며

우리들은 ', 저기 박경리 딸 지나간다' ',저기 김약국 딸이 지나간다'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분의 남편이자 박 선생님의 사위가 바로 시인 김지하였던 것이다.


"함께 문단에 있으면서도 만나는 것은 처음이네요."

어두운 실내등으로 역시 어두워 얼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조명 속에서 박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건네었다. 재미있는 것은 박 선생님이 문단 인사를 통해서 내가 좀 이상한 놈이라는 것을 전해 들으셨던 모양이었다.

젊었을 때 나는 술에 취하면 남자건 여자건 아무에게나 입을 맞추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십대 중반 나는 술만 취하면 선배건 선생님이건 왠지 애처롭고 불쌍해서 닥치는대로 부등켜안고 입을 맞추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는데, 당시 <현대문학>의 편집장으로 있었던 김수명씨의 입술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 김수영씨의 누이동생인 김수명씨는 당시 상당한 미인으로 문단에서는 모두들 마음속으로 은근히 연정들을 품고 있었던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내게는 열살 정도 연상의 여인이었지만 어느날 술에 취해서 '엣다, 모르겠다'하고 입을 맞추었는데 그 기억이 싫지가 않았는지 김수명씨가 박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최인호라는 젊은 작가가 술만 취하면 입맞춤을 하는데 그래도 밉지않고 깨끗한 편이에요."

용케도 박 선생님은 20년 전의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내게 앞의 얘기는 거두절미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해주어서 나는 우선 기분이 좋았다. 따지고 보면 옆에 앉아있는 지하 형도

내 입맞춤의 희생자였었다.


70년대 초. 종로의 골목에 '주촌'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어느날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서로 싸우고 말다툼하는 문단의 선배들이 꼴보기 싫어 쌍욕을 하면서 술집을 나서다가 지하 형을 문 입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지하 형도 보나마나 주머니가 텅 비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없는가, 있으면 공술 한잔 얻어먹겠다고 술집을 기웃거렸던 모양인데 나는 대뜸 지하 형을 만나자마자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먼 훗날 지하 형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인호 저 자식이 어찌나 격렬하게 키스를 하던지 입술이 부르트고 혀를 깨물렸어."

그이후로 지하 형은 나를 만나면 3m 이내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또다시 덤벼들어 입술을 깨물까 겁이 났으므로. 그러나 곧 지하 형은 그런 공포에서 벗어났다. 왜냐하면 <오적>인가 뭔가하는 시가 빨갱이 시로 몰려 가막소{감옥}에 무시로 들어가 있느라고 내 입맞춤의 희생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김지하.

솔직히 70년대를 보낸 모든 작가들의 머리속에는 김지하가 들어 있었음을 우리들은 부인하지 못한다.

당시 모든 작가들은 김지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김지하를 존경하는 사람, 김지하를 극복하여 보다 더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 김지하를 무시하는 사람, 그리고 김지하에게 미안해하는 사람, 대충 이런 종류로 작가들은 나뉘어지고 있었다.

70년대에 가장 유명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늘 가슴속에 끔틀거리는  한 사람을

느끼곤 하였다. 그가 바로 김지하였다. 꾸며서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70년대 내내 글을 쓸 때면 내 가슴속에서는 지하 형이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

나는 늘 지하 형에게 미안했다. 글을 쓸 때면 지하 형이 가막소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늘 미안했다. 글을 쓸 때면 폐병에 걸린 지하 형이 감방 안에서 쿨럭쿨럭 잔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항상 미안했다.

70년대의 많은 작가들이 김지하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였음을 나는 안다. 김지하를 뛰어넘기 위해서 많은 작가들이 더 많이 싸웠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는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빚쟁이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김지하를 극복하여 유명해졌으며, 더 많은 존경을 받고 문단에서

마치 조직깡패의 두목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어 그들의 작품 이상의 프리미엄을 이미 받아 영강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 나는 늘 지하 형에게 미안했다. 한때 지하 형과 함께 술울 마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보부에 끌려가 지하 형과의 관계에 관한 조서를 수십 장 쓰기도 하였다. 나는 지금껏 지하 형을 열 번 이상 만난적이 없다. 가막소에서 나왔을 때 우연히 술집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의 사무실에서, 다시 우연히 술집에서, 그리고 이처럼 우연히 정말 우연히 지하 형의 장모인 박경리 선생님의 거실에서.

나는 불과 열 번도 못되게 지하 형을 만났지만 나는 그를 안다. 그는 투사가 아니다.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술만 취하면 유행가를 밤새도록 부를 줄 아는 거렁뱅이며,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술집에 들어가 후배작가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렸냐며 술상을 뒤엎었던 자유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문단에서 내가 단 한

사람, 아직도 미안하고 미안하고 미안해 하는 내 형님이다.

소문에 듣자하니 그가 아프다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미안하다. 지하 형이 한때 너무 유명했으므로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던 만큼 그를 비난하고 고립화시키는 잔인한 시대적 폭력을 나는 손바닥 읽듯이 환히 알 수 있다. 아프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들려올 때마다 나는 여전히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가끔 만나자."

지하 형이 박 선생님의 댁을 나서는 내 길앞에 플래시를 비춰주면서 말했다. 나는 순간 지하 형의 손을 마주잡았다. 나는 20여년 전처럼 불쑥 달려들어 입술이 부르트도록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도 쉰이 넘은 중늙은이고, 나 역시 쉰이 넘은 나이이므로 그런 주책은 애써 자제하기로 하였다.

내 클래스메이트였던, 아직도 대학생처럼 긴 머리를 묶어 생머리를 한, 그러니까 형수님(?)과 나란히  부부는 플래시 불빛을 밝혀서 넘어지지 말라고 어두운 밤길을 내려오는 우리들을 휜히 밝혀주었다. 문간에 세워둔 차에 올라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솔직히 눈물을 흘렸다.

 

'하느님, 지하 형님은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몹시 아픕니다. 최근에는 나처럼 당뇨병에도 걸렸다고

합니다.

하느님. 그의 육신을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또한 그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십시오. 그는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도대체 누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 지하 형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하는 깨달음을 깨우치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무것도 이루려 하지않는 마음이야말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진리임을 깨닫게 하소서.

하느님. 김지하 프란치스코(프란치스코는 그의 가톨릭 세례명이다)와 그의 두 아들, 그리고 한때 내 클래스메이트였던 그의 아내와 장모이신 박경리 선생님 가족 위에, 다가오는 새해엔 기쁨과 평화를 풍성히 내려주소서.'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하 형, 정말 미안해.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