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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윤동주가 나고 자란 중국 옌볜을 찾다

윤소천 2015. 5. 11. 07:19

윤동주가 나고 자란 중국 옌볜을 찾다

ㆍ고향을 갖지 못한 시인, 그의 고향 아닌 고향은 여전히 ‘망향’의 땅

투명한 시어만큼 여린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았던 시인 윤동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그가 태어난 곳도, 죽은 뒤 유해가 묻힌 곳도 한국 땅은 아니다.

간도로 불렸던 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용정(룽징)시. 1800년대 후반 가난했던 조선 농민들은 농토를 찾아 남의 나라 땅으로 건너가 터를 잡았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 식민 지배를 벗어나길 염원하던 지식인들도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우리 민족이 실향민으로 떠돌던 시절 발자취가 깃든 땅 옌볜은, 이제 가깝고도 먼 조선족의 나라다. 진짜 고향을 가져보지 못했던 시인 윤동주의 아픔은 이 시대 조선족들에게 낙인처럼 대물림됐다.


■ 실향민들의 땅, 항일투쟁의 성지 간도

‘간도’라는 명칭은 조선 말기 농민들이 만든 말이다. 두만강 안에 있는 모래톱 개간지를 ‘간토’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사잇섬이라는 뜻의 간도라고 부르게 됐다. 조선 말기 국정이 혼란하고 백성 생활을 돌보는 관리가 없던 때, 농민들은 제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만주족의 나라인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전 그들이 터잡고 살던 만주 지역 지린·랴오닝·헤이룽장성 동북3성 일대는 농토가 넓고 기름졌다. 이곳은 만주족들이 베이징 황실로 옮겨가며 출입이 금지됐지만, 조선 농민들은 국경 수비대를 피해 새벽에 몰래 두만강을 건너 가 여기에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대에 들키면 청나라 땅이 아니라, 두만강 안에 있는 간도에 갔다 왔다고 둘러대 빠져나오곤 했다고 한다.

사실 매일 두만강을 건너다니며 농사를 짓는다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풍진 그이들 인생이 만만했을 거라는 게 아니라 물리적 거리가 그렇다. 현재 중국과 북한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옌볜자치주 내 투먼(도문)시에 가면 쪽배를 타고 두만강 상류부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데, 북한 땅은 말 그대로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강물도 얕아 다 자라지 못한 아이라도 순식간에 건너갈 수 있다. 그렇지만 건널 수 없는 땅이다.

쇠약해지던 청 왕조는 이런 조선인들이나 동북3성을 넘보는 러시아를 견제할 능력이 없어지자, 지린성 일대를 이민족들에게 내주기로 했다. 1885년 조선족 전문 개간지역으로 지린성 옌볜이 확정됐고 이때 오늘날 조선족 이민문학의 본산인 옌지 문화권이 만들어졌다. 간도는 옌지 일대를 부르는 말이 됐다. 1904년에는 중국과 조선 관리들이 간도 땅을 조선인들이 경작하고 세를 받기로 규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조선인 이주가 묵인되고 한반도에서 일제 수탈이 거세지면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점점 늘어 1920년 이곳 조선족 인구는 46만여명에 달했다.

1907년, 조선인과 중국인이 평화롭게 살던 용정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 간판을 내걸었다. 일본은 간도 조선인 보호를 구실삼아, 용정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설치해 독립투쟁을 압살하고 동북3성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조선인에게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던 중국은 이후 조선족을 박해하면서 청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일본 앞잡이로 치부하며 학대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바꿨다. 간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싸움 속에서 조선족은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독립에 대한 욕구와 투쟁도 거셌고 “혁명을 하려면 간도로 가라”는 유행어까지 있었다고 한다.

항일 독립운동과 혁명 정신은 당시 조선어 문학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시기 간도에서는 일제 침략에 맞서 민족을 구하고 독립하기 위해 나설 것을 호소하는 창가류의 독립군가요, 공산주의 색채를 띤 혁명가요 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런 항일가요에는 모호한 표현이나 까다로운 문구 없이, 소박하고 평범한 언어가 쓰였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용정(룽징)에 복원된 윤동주 시인의 생가.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 시내 거리.


■ 시인 윤동주의 고향 아닌 고향땅

용정에 있는 윤동주 생가 입구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라는 글귀가 쓰였다. 간도를 포함해 중국 국경 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 공정의 일환일 것이다. 윤동주는 중국 시인이 아니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국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정부는 1900년 용정에 지어졌던 그의 생가를 2012년 새로 복원하고 중요 문화재로 지정해 중점 관리하고 있다. 복원된 생가와 마을 우물 위치는 원래 터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한다.

1917년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나 꼭 27년 2개월 사는 동안 20년을 간도 지역에서 보냈던 윤동주는 조선인인가,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그의 진짜 고향은 어디인가? 아마 시인 자신도 짧은 생 내내 이 같은 물음에 시달렸던 것 같다.

“헌짚신짝 ㄲㅡㅎ을고/ 나여긔 웨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땅에// 남쪽하늘 저밑엔/ 따뜻한 내고향/ 내어머니 게신곧/ 그리운 고향집.” (<동시 고향집 - 만주에서불은->)

임헌영 문학평론가는 “윤동주에게 간도란 태어나긴 했지만 고향 의식을 심어주지 못한 타향”이라고 했다. 윤동주는 옌볜의 명동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자신의 고향을 “남쪽 하늘 저 밑”, “따뜻한 내 고향”이라고 칭한다. 이 시에서 ‘남쪽’이란 남북 분단 뒤 우리가 부르는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일 수도 있고, 이상향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태어난 간도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고 흐느끼지만, 북간도를 고향이라고 쓰지 않았다. 시인은 고향을 갈구하지만, 북간도의 자연, 그곳 사람들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윤동주에게 고향은 단순히 향수를 달래거나 제 안위를 편히 할 자리가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자유롭게 합일되는 이상향이지만 식민 지배하에서는 가질 수 없어 쓰라린 것이었을 테다.

윤동주의 생가와 묘소, 그가 다녔던 대성중학교 옛터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여행 코스다. 용정 대성중학교 자리에는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사와 독립 운동 역사, 윤동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요식적으로 정리해 둔 박물관이 있다. 윤동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과 이해에는 진정이 얼마만큼 담겨 있을까. 일본 형무소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조사받다가 옥사해 용정에 쓸쓸하게 묻힌 그의 묘소를 처음 찾아낸 것은 옌볜 조선족도, 한국인도 아니었다. 조선문학 전공자인 일본인 오무라 마스오 전 와세다 대학 교수가 1985년 옌지대학 교환교수로 가면서 그의 묘소를 발견했고, 사재를 털어 정리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선생 부탁을 받고서였다.

윤동주 시인이 생전 다녔던 용정(룽징) 대성중학교 터에 세워진 박물관.


용정(룽징)의 윤동주 시인 묘소.


■ 가깝고도 먼 조선족의 나라 옌볜

옌볜자치주의 주도 옌지 공항에 내려 시내에 들어서면 기묘한 기시감이 찾아온다. 한국의 어떤 대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널찍한 도로와 거대한 건물은 대륙다운 장관을 이루는데 그 속에는 한글이 빼곡하다. 한글과 한자가 나란히 있으며, 우리가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조선족들의 말소리가 모국어인 이 도시는 익숙할 법하면 좀체 낯설다. 서로 동포라고 부르면서도 살갑지 못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처럼, 옌볜에 온 한국인만이 가질 법한 종류의 긴장감이 있다.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소수민족 중 드물게 고유의 언어인 조선어를 지키고 있다. 중국어와 조선어를 공용어로 쓰기에 상점 간판은 물론 모든 언어 표기는 조선어 다음 한자어가 놓이는 식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유화 정책이 이를 허용한다. 조선족의 교과서도 조선어로 돼 있다. 그러나 조선어로 쓰인 역사와 문학, 지리 그 내용은 모두 중국의 것이다. 조선족들은 월드컵 때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응원하고, 독도 문제가 나오면 한국인처럼 흥분하며 일본을 비난한다. 하지만 역시 그렇지 않은 조선족도 많다.

조선인의 간도 이주 역사가 150여년이 되어가는 동안 조선어는 지켜왔지만, 그 명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옌볜에서 한국 혹은 중국의 다른 대도시로 이주하는 조선족이 늘고 있다. 특히 중국 대도시로 나가는 조선족 청년층은 조선어를 쓸 일이 줄어드는 데다, 한국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라는 의식도 희박하다. 지금 한국 젊은이들이 일제 식민 지배와 친일 청산, 남북 분단과 이산의 문제를 자기 정체성으로까지 깊이 받아들여 고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옌볜을 떠나 중국 다른 대도시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한 조선족 청년은 “우리가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크지만, 그게 한국과 연관되지는 않는다”며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다. 여행하러 온 한국인들을 만나봐도 좋은 사람이 드물고, 한국에 돈 벌겠다고 갔던 사람들 이야기 들어봐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조선족 중장년층은 실향민 의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증조부모와 그 부모들은 조선 땅에 고향을 두고 간도로 건너왔고, 그 자신들은 고향 옌볜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나간다.

“우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어디도 갈 수 없이 변두리에 끼어 살아온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옌볜 | 글·사진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


 

경향신문 입력 : 2014-09-10 21:08:44수정 : 2014-09-10 23:08:36


 

(http://news.khan.co.kr/kh_news/art_print.html?artid=201409102108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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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현실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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