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 박완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 것은 1951년이 저물어가는 겨울이었다. 그 때 나는 21세였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 이듬해였다. 그 때만 해도 서울대에 여학생 수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희귀했고, 특히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긍심이 대단할 때라 나도 내 위에 누가 있으랴 싶게 콧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6·25가 나고 집안이 몰락해서 어린 조카들과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학업을 계혹할 가망은커녕 입에 풀칠할 방도도 나에겐 난감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바닥나 이제 굶어 죽을 일밖에 남지 않은 날. 길에서 우연히 오빠의 친구를 만났다. 오빠는 전쟁통에 죽었는데 그는 살아남은 게 꼴보기 싫어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그가 반색을 했다. 그는 신수가 훤하고, 기름이 잘잘 흐르는 미군복 바지에 줄을 칼날같이 세우고, 당시 유엔 잠바라고 불리던, 지금의 파커 비슷한 군용 윗도리를 입고 폼을 재고 있었다. 어디 다니냐고 물었더니 PX다닌다고 했다.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그가 부러웠다. 그 때 나는 혹시 어디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 무턱대고 싸다니던 중이었으니까.
서울의 번화가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한강 이남의 피난민의 도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온전한 주택가도 텅텅 비어 있었다. 직장이 있을 리 없었다. 살아있는 경기라곤 오직 미군부대 주변의 양공주 경기가 무슨 도깨비불처럼 요괴롭게 명멸할 뿐이었다. 그런데 PX라니, 그 때 미 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일대의 큰 건물들이 다 불타고 파괴된 가운데 오직 그 건물만이 온전했다. 그러나 비록 폐허가 됐을망정 PX에서 흘러나오는 미군 물자와 PX를 드나드는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로 그 일대는 딴 세상처럼 화려했고 시끌시끌한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장사꾼뿐 아니라 오물을 한 깡통씩 들고 다니며 PX걸을 협박해서 돈을 구걸하기도 하고, 미군의 소지품을 슬쩍하기도 하고, 눈을 찡긋해가며 "넘버원 색시 해브 예스 오케이?"하기도 하는 거지와 소매치기와 뚜쟁이를 겸한 소년들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 때 전쟁의 불안과 가난에 찌든 우리가 밖에서 보기에 PX야 말로 별세계였다.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온갖 진기한 보물이 널려 있는 꿈의 보고였다. 나는 가망 없는 줄 알면서도 그에게 나의 곤경을 부끄럼없이 털어 놓고 취직을 부탁했다. 그는 허풍선이처럼 선선히 승낙을 한 뒤, 나를 당장 그 안에 데리고 들어가더니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몇 마디 해 준 걸로 내 취직은 쉽게 결정됐다. 거짓말처럼 쉬웠다.
그러나 알고 보니 진짜 PX걸이 된 것이 아니라 한국물산 위탁매장의 점원이 된 것이었다. 그 때 PX는 아래층만 매점이었는데 그것도 삼분의 일 가량은 한국인 업자에게 위탁매장으로 내 주고 있었다. 처음 내가 일한 곳은 요란한 수를 놓은 가운이나 파자마를 파는 매장이었는데 한달도 안 돼 같은 업주가 경영하는 초상화부로 가게 되었다. 초상화부엔 다섯 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업주는 그들을 훗두루 간판쟁이들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전쟁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딴 간판쟁이와 다른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비해 비좁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내가 초상화부에서 할 일은 물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화가를 뒷바라지하면서 미군으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맡는 일이었다. 제 발로 걸어와서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주문하는 미군은 거의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초상화를 그리도록 꾀는 일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그 일은 물건을 파는 일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영어도 짧은데다가 꽁하고 교만한 성격도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식구가 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만 두어버릴까 보다고 매일 아침 벼를 정도였다. 나에겐 전혀 맞지 않는 일이어서 그림 주문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업주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 화가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제였지만 그들은 작업량에 따라 일주일에 한번씩 그림삯을 타가게 되어 있었다. 내 식구뿐 아니라 화가들 식구의 밥줄까지 달려 있다는 무서운 책임감이 조금씩 내 말문을 열게 했다.
화가들이 나에게 불평을 다 할 때도 그는 거기 동조하는 일이 없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 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닥은
결코 착하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 만큼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돼먹지 않은 영어로 미군에게 수작을 걸 수 있게 되고, 차츰 그림 주문도 늘어날 무렵부터 화가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을 한껏 무시하고 구박하게 했다. 그들은 거의 사십대로 나에겐 아버지뻘은 되는 어른인데도 나는 그들을 김씨, 이씨 하고, 마치 부리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마구 불러댔다.
김 선생님, 이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싫었으면 하다 못해 김씨 아저씨, 이씨 아저씨라고 해도 좋으련만 꼬박꼬박 김씨, 이씨였다. 그도 물론 박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양가집 딸로, 또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쟁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 때 내가 더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매장은 물건이 한번 팔면 끝나는데 초상화부는 그림 주문을 맡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주문한 그림을 찾으러 올 때가 더 문제였다. 미군들도 제 얼굴을 그려 달라는 이는 거의 없고 애인이나 아내 혹은 딸의 사진을 맡기고 그려 달라는데, 찾으러 와서는 닮지 않았다느니 실물보다 밉다느니 트집을 잡기가 일쑤였다. 주문을 맡은 때보다 찾아갈 때에 더 능란한 수완을 요했다. 만약 내가 그들의 트집을 달래고 설득하기가 귀찮아서 다시 그려 주겠다고 반품을 받으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화가들에게 돌아갔다. 공짜로 또 한 장을 그려야 한다는 시간과 노력의 손해보다 재료값을 주급에서 공제하는 걸 그들은 몹시 억울해 했다. 당시 초상화부에서 쓴 화판은 캔버스가 아닌 스카프, 손수건, 사륙배 판 크기의 노방조각 등 세 종류였다.
그 중 인기품목이 스카프였다. 나는 실크 스카프라고 허풍을 떨었지만 아주 조잡하게 짠 네모난 인조견 보자기 한쪽 모서리에 용의 모양을 나염한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안감으로도 안 쓸 번들번들한 인조견 조각이 원가가 1달러 30센트였고 나염한 용과 대각선이 되는 모서리에다 초상화를 그리면 6달러를 받았다. 화가에게 그중 얼마가 공건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림 하나를 망치면 1달러 30센트를 고스란히 물어내야만 했다.
반품받는 것을 그들은 '빠꾸 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기분이 언짢으면 함부로 빠꾸 받는다는 걸 알고 내 비위를 맞추려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무리가 아니였다. 그럴수록 나는 그들을 깔보고 한껏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하찮은 그들을 위해 나의 그 대단한 자존심을 팔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색을 내도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싹수머리 없이 못되게 굴었나를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틈만 있으면 고개를 곧추세우고 뒷짐을 지고, 화가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들의 그림 솜씨를 모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김씨 사진 좀 똑바로 보고 그려요. 원 눈을 감고 그리나, 발가락으로 그리나..., 이렇게 그려 놓고도 빠꾸 받으면 내 탓처럼 굴겠지." 이런 식이었다. 영낙없이 아무런 애정없이 지진아를 따로 지도하는 국민학생 선생님처럼 행세했다.
어느날 그가 그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쟁이가 화가 될 줄 아남'하고 비웃었다.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 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국민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村婦)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선전(宣戰)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일제시대의 관전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 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왜 어느 날 느닷없이 그 화집을 나에게 보여 줬을까. 간판쟁이들과 다르게 보임으로써 내 구박을 조금이라도 덜 받아보려고 그랬을까? 그러나 나에게 그 화집을 잠깐 보여 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잘난 척이라곤 모르고 간판쟁이들 중에서 가장 존재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그가 신분을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하고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생활이 한결 견디기가 쉬워졌다. 그에 대한 연민이 그 불우한 시대를 함께 어렵게 사는 간판쟁이들,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을 일으킨 내 심정을 축여 오는 듯했다. 비로소 내가 막 되어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 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거의 매일 같은 퇴근을 했는데 한번도 저녁을 같이 먹거나 그의 집에 따라가 본 적은 없다. 을지로 입구 전차 정류장까지 같이 걷다가 도중에서 명동으로 빠지는 게 고작이었다. 나의 처녀작 [나목(裸木)]에서도 몇 번 나오지만 그와 나는 명동 노점상에서 장난감을 구경하기를 즐겼다. 지금에야 별의별 신기한 장난감이 많지만, 그 때만 해도 태엽을 틀어주면 한참 동안 저절로 움직이는 장난감은 PX를 통해 흘러나온 외제뿐이어서 행인들이 겹겹이 둘러서서 구경을 했었다. 태엽만 틀어 주면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기도 하고 시끄럽게 징을 치기도 하는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나는 배창자가 땅기도록 깔깔대고 그도 빙그레 웃으면서 장사꾼한테 또 한번 해달라고 간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길에서 군밤이나 호콩을 사서 한껏 느리게 까 먹으면서 전차 정류장까지 걷기도 했고 다방에 들리기도 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다방은, 지금은 단자회사지만 전쟁 전까지는 시공관이던 건물에서 을지로 쪽으로 빠지는
골목 중간쯤에 있는 '세븐 투 세븐'이란 다방이었다. 간판은 '727'로 붙어 있었다. 비스듬히 건너에는 '모나리자'라는 큰 다방이 있었는데 우리는 주로 작고 호적한 '727'을 이용했다. 마담은 포도주색 빌로드 치마에 분홍 양단저고리가 잘 어울리는 살색이 희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중년 여인이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순금(純金)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허점을 드러내지 않고 처신을 당차게 하는 여인 같았다. 거기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포성이 유난히 가까이 들리는 날은 둘 다 말을 끊고 우울한 얼굴로 귀를 귀울였었다. 52년도의 서울은 짙은 전운(戰雲)이 감도는 최전방 도시였다. 포성을 들을 때마다 나는 온종일 브로큰 잉글리쉬로 꼬부라졌던 혀를 풀고, 그는 이국(異國)여자들의 싸구려 화상을 그리는 노역에서 놓여나 오붓하게 마주 앉아 있는 그 작은 행복과 평화마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떨리곤 했다.
그는 워낙 말 수가 적어서 말은 주로 나 혼자 맡아서 했는데도 그의 가족에 대해서 물은 적은 한번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사시장철 변함없는 빛 바랜 작업복과, 간판쟁이들과 어울려서라도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처지로 미루어 그의 아내를 무식하고 거칠고 온종일 바가지나 긁고 아이들을 울릴 능력밖에 없는 끔찍한 여자로 상상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범한 그에게 그 정도의 비극적인 장식을 해 주고 싶었던 게 그 때까지 남아 있던 나의 소녀 취미였다. 그러나 그를 모델로 한 소설 [나목]에선 그의 아내를 빼어난 이조백자에 비유할 만큼 미화시키고 있다. [나목]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유작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미모와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분이었다.
나는 그 때 어찌나 놀랐는지 인사도 못하고 먼 발치로 바라만 보다가 나오고 말았다. 놀랐을 뿐 아니라 배신감 비슷한 쓰디쓴 감정까지 솟구쳤다. 그가 나에게 한번도 그의 부인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으나 나는 순전히 나의 상상력에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의 부인의 미모와 부덕을 진작 알았던들 [나목]에서 절대로 그 분을 그렇게 미화시키지는 않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 멋대로 상상한 추녀 악처에 대한 보상 심리가 소설 속에서나마 그녀를 미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와 나의 일 년 남짓한 사귐에 조금이라도 불순한 게 섞였다면 아마 그 정도가 아닌가 싶어 이 기회에 털어 놓는다.
그 일 년 동안에는 봄도 가을도 여름도 있었으련만 왠지 그가 걸었던 길가엔 겨울풍경만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그린 나목 때문일까.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그해 겨울, 내 눈엔 마냥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에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가 가슴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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