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잡초를 뽑으며 / 홍윤숙

윤소천 2015. 3. 19. 08:53

 

 

잡초를 뽑으며

잡념을 뽑으며

긴 여름날 땀을 흘렸다

 

진실의 칼을 갈아

허위의 여름을 베어 버리고

잡초의 흉계(凶計)를 베어버리고

한 발씩 긴 비애의 숙근(宿根)을

뿌리째 뽑아내고

빈자리에

평화의 마른 흙을 갈아 덮었더니

겨울이 어느새 먼저 들어와

땀으로 젖은 땅을 점거(占據)하고

불모의 암석(巖石)을 깔아 버렸다

 

긴 여름날 땀 흘려 뽑아낸

잡초의 뿌리

이름 모를 비애며 사랑 기타

자고 새면 길로 자라 해를 가리던

질기고 악센 잡초의 뿌리

늘 한 줌씩 피 묻은 살점이 묻어 있더니

그게 바로 내 뜰의 꽃이었음을

살과 피의 집이었음을

겨울이 와서야 내가 알았다

빈 뜰을 쓸어가는 바람을 보고야

그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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