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빈 벽 / 정호승

윤소천 2015. 3. 8. 20:33

 

 

 

 

빈     

 

 

 

 

 

 

 

 

 

벽에 걸어두었던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빈 벽이 된 벽이 가만히 다가와

톡톡 아버지처럼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준다

못은 아직 빈 벽에 그대로 박혀있다

빈 벽은 누구에게나 녹슨 못 하나쯤 운명처럼 박혀 있다고

못을 뽑으려는 나를 애써 말린다

지금까지 내 죄의 무게까지 견디고 있었던 저 못의 일생에 대해

내가 무슨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벽에 걸어놓아야만 벽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스러져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캄캄한 내 눈물의 빈방에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빈 벽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는 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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