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약 속 / 홍윤숙

윤소천 2015. 3. 15. 16:53

 

 

 

온종일

속옷 적시고

속살 적시고

마른 딱지 솔솔 붓끝으로 헤집으며

사븐사븐 뼛속으로 젖어드는 비

 

이 비 그치면 저 숲의 잿빛 나무들

일제히 연록색 발진으로

전신이 가려워 미칠 것이다

절개도 없이 무너질 것이다

 

마른 살 톡톡 실밥 터트리며 간질이는 비의 손끝

그 손끝에 닿으면

돌처럼 굳은살도 석류 알 벌여지듯 못 견디게 벌어져

복사꽃 같은 오얏꽃 같은 꽃봉오리 뭉실뭉실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약속이니까

 

봄이 오고 꽃이 핀다는 이 평범한 질서가

이 세상 살아 있는 날의 아름다운 약속이

이제야 눈부시게 내게 보인다

그 많은 세월 다 지내 놓고

더는 꿈꿀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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