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빈 항아리 5 / 홍윤숙

윤소천 2015. 2. 5. 21:28

 

 

 

 

빈 항아리 5

 

 

 

 

 

 

 

 

 

 

빈 항아리 속엔

잡목나무 툭툭 찍어 무작위로 세운

산사 하나 아니 산사도 못되는

암자 하나 있습니다

 

울타리도 산문(山門)도 없는

온종일 비바람과 마른 잎과

정체 모를 모스가 제멋대로 날아드는 암자엔

먼 길에 핍진한 나그네 혼자

저녁 등불 켜놓고 앉아 있습니다

 

그의 기억 속엔 잎 지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이 찍혀 있을 뿐

그밖의 계절은 신화처럼 아득하여

추억으로 가는 길도 막혔습니다

 

나그네는 혼자 종일 문 열어놓고

산 아래 먼 마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막연히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은 다만 의미없이 길들여진 습관일뿐

사실은 아무것도 올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덩그렇게 빈 공간이 점점 자라서

어느 날 스스로 묻힐 묘지가 될 것을 예감하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그가 살아온 지상의 집엔

지붕도 있고 서까래도 든든하여

비바람 눈보라 막아주었으나

안식이 없었다고

지금 텅 빈 항아리 속 해묵은 암자엔

지붕도 문도 없이 비바람 제멋대로 들이치지만

알 수 없는 안식이

따스한 용서의 눈길로 감싸온다고

 

이미 해 저물어 산도 길도 마음도

어둠으로 지워져 지상의 땅끝 어디쯤인지도 모를

빈 항아리 속 허궁에 앉아서

끝없이 무변한 광야가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따뜻하여 눈물나는

눈부시게 흰 허무의 꽃 한 송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기이한 향기에 가슴 젖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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