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상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 ? / 백성호의 현문우답

윤소천 2015. 1. 12. 08:30

 

 

 

# 풍경 1 : 당나라 재상 배휴(裴休)가 황벽(黃檗) 선사를 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웠죠. 배휴는 작은 금불상을 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 황벽 선사에게 부탁했죠. “이 부처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선사는 느닷없이 “배~휴!”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배휴는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황벽 선사는 더 말이 없었습니다.

배휴는 선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죠. 선사가 입을 땠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재상” 배휴는 고개만 갸우뚱했죠. 그러자 선사가 말했습니다.

“지금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고 배휴는

활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선사에게 큰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 풍경 2 : 그리스의 밧모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유배를

당했던 섬이죠. 90세가 다 된 요한은 이 섬에서 18개월간

살았습니다. 그 때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동굴 안에서 요한은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동굴에서 요한복음 1장을 속으로 읊었습니다.

그 울림은 너무도 각별하니까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 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구절이 표창처럼

날아와 박히더군요. 사람들은 이 대목의 대상이 ‘예수’라고만 생각합니다.

나를 향한 글, 나의 글이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진리가 사람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라고만 해석합니다. 그래서

반박합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동격이 될 수가 있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건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만 가능한 일이지!”

기세게받아 칩니다. 성경을 다시 펼쳐봅니다. 예수의 말씀이 빼곡합니다.

종이 위에 문자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성경 속의 말씀은 육신이 될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럼 어찌해야 말씀이 육신이 될까요. 또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살까요. 그 열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펴서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을 골라 보세요.

가령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혹은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를 뽑았다고 해요. 그럼 그 구절을 마음에 담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나의 하루를 살피며 대입할 타이밍을 찾으면

됩니다. 다투었던 직장 동료, 남편 혹은 아내가 있다면 먼저 다가가서

사과를 하는 겁니다. ‘남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그걸 행하는 순간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겁니다.  그걸 통해 나와

동료의 마음이 풀리죠. 그때 육신이 된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는’ 겁니다.

성경 속의 말씀이 나의 육신을 통해 사는 겁니다.

   

황벽 선사가 “배휴!”하고 소리친 것도 마찬가지죠. “불상의

이름을 지으라고?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일격을 가한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배휴가 바로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 뜻을 알아채고 재상이 선사에게 큰절을 한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는 것, 늘 가능합니다.

그 모두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