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허 (虛) / 구 상

윤소천 2014. 10. 5. 19:52

 

 

허 (虛)

 

 

  

 

제군(諸君)!

이 소식(消息)을 알자면, 먼저

두꺼운 욕망(慾望)의 덮개로 막히고

밑 없는 불안(不安)으로 휘덮인 마음을

빈 항아리로 비워 놓게.

 

그럴양이면 아롱진 바람들과

고름낀 인업(因業)들이

민들레 마른 꽃술인양 스러져

흩어질 걸세.

애증(愛憎)의 동아줄도 풀어 질 걸세.

선악(善惡)의 철창(鐵窓)도 옅어 질 걸세.

신화(神話)의 망루(望樓)도 무너질 걸세.

마침내 그대는 화평(和平)으로

해방(解放)된다는 말일세.

 

제군(諸君)!

허(許)란 실상 실유(實有) 그것일세.

어둠에서 빛으로

불에서 물로

진창에서 꽃밭으로

식료(食料)에서 변통(便痛)으로

바람에서 돌속으로

사람에게서 짐승으로

물고기에서 땅벌레에게로

죄인(罪人)의 눈빛에서 간수(看守)의 눈빛으로

여왕(女王)에게서 걸인(乞人)에게로

시(詩)에서 과학(科學)으로

전쟁(戰爭)에서 평화(平和)로

봄 여울에 눈녹아 흐르듯 흐르며

또한 동양화(東洋畵)의 여백(餘白)같이 본래(本來)있어

생사(生死)와 명멸(明滅)을 낳고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채워서

남음이 없지.

 

그래서 허(虛)는 존재(存在)와 생성(生成)을

휘연(揮然)케 하고

운명(運命)과 자유(自由)를 병존(並存)케 하며

모든 실존(實存)의 개가(凱歌)를 올려

저 허허(虛虛)한 창공(蒼空)을 스스로의 안에서

대응(對應)시키는 조화(造化)속일세.

 

제군(諸君)! 그러나 이 경지(境地)는

막다른 심연(深淵)의 축복(祝福)에서

드맑은 정상(頂上)에 이르는

생(生)의 화해(和解)된 인지(認知)라는 것을

납득(納得)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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