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 21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읽고 싶은 시 2025.02.17

개안(開眼) / 박목월

나이 60에 겨우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神이 지으신 오묘한그것을 그것으로볼 수 있는흐리지 않은 눈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채색하지 않고있는 그대로의 꽃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충만하고 풍부하다.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至福한 눈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神의 옆자리로 살며시다가가아름답습니다.감탄할 뿐神이 빚은 술잔에축배의 술을 따를 뿐.

읽고 싶은 시 2025.02.17

성숙한 사랑을 위해 / 가토 다이조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받을 수는 있어도노력하지 않고서 사랑할 수는 없네.​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무거운 짐을 정면에서 떠맡는 것.​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다,무엇인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무엇인가를 붙잡고 싶다,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내던져 버리고 홀로 굳건히 서기 위한 노력.​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선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네.​사랑하려고 애쓰는 노력은자기 중심적 생각과 행동으로 부터 한 걸음씩 벗어나는 일.역경에 무너지지 않고고통에 쓰러지지 않고나의 슬픔을 뛰어넘어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하는 것.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더욱더 성숙해지는 일.​노력하지 않고서 사랑받을 수는 있어도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할 수는 없네.

읽고 싶은 시 2025.02.12

눈 /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살얼음 에는 겨울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갓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물 소리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읽고 싶은 시 2025.02.11

폭설, 그 이튿날 / 안도현

눈이 와서,대숲은 모처럼 누었다​대숲은 아주 천천히눈이 깔라놓은 구들장 속으로 허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아침해가 떠올라도 자는 척,게으런 척,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밤새 발이 곱은 참새들발가락에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참새들이 재재거리며 대숲을 빠져나간 뒤에대숲은 눈을 툭툭 털고일순간,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25.02.11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읽고 싶은 시 2025.02.11

입춘이면 / 박노해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은미한 떨림을 듣는다​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눈밭이 눈물로 녹아내리고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산 것과 죽은 것이창호지처럼 얇구나​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읽고 싶은 시 202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