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야래향(夜來香) / 윤모촌

윤소천 2019. 5. 30. 07:38

 

 

 

 

 

밤에 향기를 낸다 해서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한 꽃은

실상 꽃답지가 않다. 혹(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향기도 향기려니와,

꽃 이름에 더 마음이 사로잡힌다. 말없이 곁으로 다가서는

정인(情人)의 기척을 느끼게 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반가운 손(客)처럼

마주치게도 한다. 무념(無念)히 다가서게 하는 이름이며,

마력(魔力)의 향기를 지닌 꽃이다. 매력 있는 이름이 이보다

 있을 것 같지 않다.

 

선영의향(扇影衣香), 은은한 미인을 연상케 하고,

중국이 원산이어서 그런가, 대륙의 풍정(風情)에 잠기게도 한다.

호궁(胡弓)의 애련한 엘레지가 들려오는 듯도 하여,

역시 대륙의 꽃 능소화(凌莦花), 협죽도(夾竹挑)등에 어우러져

환상의 나라로 이끄는 이름이다. 그리하여 서시(西施)와

양귀비(楊貴妃)의 거실 곁으로도 인도한다.

 

낮에 다투어 피는 꽃 중에, 야래향은 무슨 일로 밤에

피어나는 것일까. 전설이 있음직하다. 박색(薄色) 여인의

한(恨)일듯 싶다. 남정(男丁)을 사로잡기 위해 향기의

침실을 꾸렸음인가. 야래향은 땅거미와 더불어 피기 시작하다가

동이 트고 날이 밝기 시작하면, 밤 내 뿜던 향기를

거두고 꽃을 오므린다. 한 그루의 꽃이면 여름밤 집 안팎을

향내로 메운다. 난향(蘭香)처럼 점잖아서 가볍지 않고,

백합처럼 칙칙하지 않아 천박하지 않다.

 

국화가 서리를 오기(傲氣)로 피워내 일품이기는 하나,

그 향은 야래향에 댈 수 없다. 섣부른 프랑스제 향수도 이에 못 미친다.

  한 가지 험이 있다면, 꽃으로서는 등외품(等外品)이다. 화사하네 

요염하네 따위의 형용은 가당치 않아 아예 꽃이 되지 않는다.

활짝 피었을 때라야 4-5미리 정도의 크기이고, 연록색 빛깔은 

꽃빛이 아니다. 모양은 나팔꽃 형태를 하고, 자질구레해서

볼품이 없다. 요염스러워 가볍게 보이는 꽃들에 대면,

야래향은 몸매무시와는 무관한 여인의 모습 같은 꽃이다.

 

건삽(乾澁)한 하루를 밖으로 나돌다 돌아오는 밤엔,

문간에서 먼저 나와 나를 잡는다. 입원한 안사람을 들여다보고

돌아오는 저녁도, 스산한 마음을 감싸 안는다. 터서리에 고여있는

허섭스레기 상념들을 말끔히 가셔주니, 십년지기(十年知己)와

다를 것이 없다. 세 철을 떨어져 있다가 한 철만을 더불어 살지만,

다른 것은 외면할 수 있어도, 야래향은 외면할 수 없다.

이 구석 저 구석을 들여다봐도, 야래향보다 향기로울 게 없으니,

이름에 이끌리고 향기에 붙들려, 밤마다 만나는 꽃이 야래향이다.

 

( 1982.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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