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산 마을에 오는 비 / 윤모촌

윤소천 2019. 5. 2. 08:47

 

 

 

길을 가다 비를 만나게 되면 나무나 추녀 밑으로 들어가

긋게 되는데, 아무래도 젖게 마련이다. 어쩌다 동성(同姓)인

남자 우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용기가 안 나고,

여자 우산 속으로는 더더구나 들어설 수 없다. 이쪽에서 우산을

받고 갈 때도 그러해서, 여성을 불러들이자니 이상 한 눈으로

 볼 것이고, 남자를 들이려 하다가도 선뜻 내키지 않아

피차가 그대로 간다. 이것은 서로가 옹졸한 탓이다. 이들 가운데는,

물독에 빠진 쥐처럼 비를 맞으며 쏘다니는 아이가 있다.

심리학에 의하면 이것은 욕구불만의 증상이라 한다. 기쁨이나 슬픔

따위로 충격 상태에 있을 때가 그러하다는 것인데,

나도 비가 오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던 때가 있다.

육친과 남북으로 갈린 쓰라림이 그렇게 했던 모양이다.

 

광복 다음 해, 그해 여름은 한달 내내 비가 내렸다.

지금같이 여행도 생각할 수 없는 때여서, 하숙을 하던 산마을

사랑방에서 하는 수 없이 한 달 동안을 갇혀 지냈다. 흙내가

나는 방이었지만, 주인 영감이 군불을 넣어주곤 해서, 부숭부숭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는 담뱃대에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혀 물고는, 객지에서 몸이 성해야 한다면서 한사코 나를

 아랫목으로  다가 앉으라 하였다. 내가 신세를 지던 그 농가는

유천(柳泉) 화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초가이다.

 

여남은 집 모여 사는 산촌에 진종일 내리던 비가

너누룩하면, 장닭의 목청이 유장(悠長)하게 들린다. 저녘을 짓는

안채의 부엌에선, 젖은 보리짚 때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보리짚을 땔 때는 덜 털린 보리 알이 튀는 소리가 난다. 연기가

마당으로 기어 퍼지고, 마을의 추녀마다 모연(暮煙)이 감돌면,

앞산 허리에는 자하(紫霞)의 띠가 둘린다.

산마을에 내리는 비의 정(情)은 이래서 운치의 극을 이룬다.

 

서울에 와 살게 되면서 나는 비오는 날의 그런 서정과

소원해졌다. "미도파에 비는 내리는데..."하고 서울의 우정(雨情)을

노래한 시가 있으나, 나는 서울의 빌딩에 내리는 비에 정을

못 느낀다. 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달픈 사람과 연인과 시인에게

고독과 시름과 아름다운 회상을 안겨준다.

"거리에 비오듯이 내 마음속에 눈물 비 오네..."하고 서구(西歐}의

시인은 노래했지만, "밤비 내리는 어둠 속에 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 고요한 등불아래 우는 풀벌레 소리여 (雨中山果落

燈下草蟲鳴)"하고 동양의 시인은 자연속에서 시심을 노래했다.

 

비오는 날의 연인의 우산 속은 감미롭다. 아무도 없는 산길

우산 속에서, 지난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손목 한번을 잡아 보지

못하고 함께 우산을 받았다. 요새는 곁에 사람이 있어도

거리낌 없는 젊은이들을 본다. 한자 용어에는 우(雨)자를 쓴 말이 많다.

'우'를 붙이면 만들어지는 말이 또 많다. '우촌(雨村)'은

글자대로 비오는 마을이다. 평범한 이 말이 자전(字典)에 올라 있는

까닭을 생각해 본다. 이말에는 선인들의 풍류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련한 연하(煙霞) 속에 잠긴 마을 -

그 수묵색운(水墨色韻)에 숨어있는 마을이 우촌이다.

 

농촌 사람들은 봄비는 잠비요 가을비는 떡비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춘곤(春困)을 풀어주던 봄비가, 낮잠을 자게

하는 여유의 구실을 하지 않는다. 비닐 하우스로 삶의

내면이 각박해져 가는 농촌 인심 - 울타리와 사립문 대신 시멘트

블록담이 높아진 농촌에는, 지난날의 빗소리가 주던

서정이 사라졌다. 객지에서 몸 성해야 한다며, 나를 아랫목으로

앉히던 늙은 농부의 정 - 산 마을엔 지금도

비가 올 테지만, 마음을 적시던 그 노농(老農)의

인정(人情)의 비를 맞고 싶다.

 

( 1979.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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