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빗소리 / 김수봉

윤소천 2016. 4. 3. 20:25

 

 

 

 

나는 전에 양철 지붕 아래서 빗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빗줄기는 세차서 지붕을 때리는 소리 외엔

그 어떤 소리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는 풀잎이나

수면에 떨어지는 빗소리 혹은 악머구리 소리도 있었으련만,

 양철 지붕이 울어대는 소리에 그 모든 소리들은 물러나

있었다. 허허벌판 저수지가의 농막이었는데, 밤낚시를 나가서

돌연히 만난 폭우였다. 초저녁에 시작한 비가 한 줄기 긋고

지나가겠지 하고 곁에 있는 농막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비는 새벽까지 내리붓고 있었다. 귓속이 멍~해지도록 두둘겨대는

난타, 마치 휘모리장단으로 쳐대는 장구 소리를 장구통

속에서 듣고 있다면 이러할까.

 

공포와 외로움, 내 스스로 결박해버린 자유, 내 귀에서는

웅웅거림만이 반복되고...... 그때 내 머리를 스쳐간 것은 그래,

이 소리를 하나의 이명(耳鳴)으로 치자, 그리고 이 이명을

평상의 소리로 여기기로 하자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외로움과 조급함이 사라져갔다. 귀에서는 다시 새로운

빗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기억의 저편에서 맨 먼저 들려오는

것은 낙숫물 소리였다. 여름 낮에 소나기 한 줄기가

 내리고 간 뒤 처마 끝에서 여운처럼 떨어지던 물소리, 메마른

땅에 빗물은 어느새 스며버려도 낙숫물은 기스락 아래에 작은

흙구덩을 내며 떨어진다. 거기서는 포말방울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몇 개의 현()을 손끝으로 퉁기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낙숫물이 한겨울만큼 일품일 때가 있을까. 사나흘 내린

눈이 모처럼 비추는 햇볕을 받아 녹을 때, 처마 끝에서 고드름을

타고 내리며 얼다 녹다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 날씨가

 포근한 날이면 밤이 되어도 지붕위의 눈은 얼지만 않고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적요한 밤, 달빛 희부연 봉창 아래 앉아

이 소리를 들을 때는, 옛 선비들도 잠시 서안(書案)

 밀치고 귀를 기울였으리라. 소리 없이 내리는 비보다는 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라야 우수(憂愁)가 동반되지 않는다.

 

댓잎을 후려치는 비바람 소리는 우리에게 역동을 보여주고,

콩밭이나 벼이삭에 내리는 가랑비 소리는 가슴에 스며드는 인정처럼

다사롭다. 연인과 함께 받고 가며 듣는 우산 속의 가랑비 소리는

꿈같은 사랑의 피아니시모가 아니랴. 맨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비록

둔탁한 소리를 내지만 흙을 어루만지며 격려하고,

내일의 풍요를 속삭이는 약속의 소리다.

 

나는 섬진강 상류의 자갈밭 여울에서 흩뿌리는 빗소리를 오래오래

듣고 있었던 적이 있다. 여울물 소리와 빗소리, 거기에는 빠름과 느림,

약과 강이 그냥 어우러진 태고 그대로의 소리가 있었다. 강물과

빗방울들이 오랜만의 상봉처럼 얼싸안으며 감격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낙숫물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고드름도

여간해선 볼 수가 없다. 가랑비는 밖을 내다보지 않으면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른다.

 

세찬 비가 내릴 때는 웅웅거리는 소음을

만들어 낼 뿐, 창밖을 내려다보아도 시멘트 바닥과 거기 딱정벌레들

처럼 엎드린 차들에 빗줄기는 내리건만 튀어 오르는 빗방울의

비명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서로 앞서가려고 지르는 비명, 내 것만

챙기자고, 내 말만 들으라고 아귀다툼하는 비명들이 이

아파트 숲에서는 비와 함께 유령처럼 웅성거린다. 그러나 나 또한 눈앞의

평안과 편리만을 좇아 이 축에 끼여 살아간다. 그러면서 조금씩

예사로워져 가고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

 

 

바람 부는 둔덕에 서면, 밀밭을 출렁거리게 하던

바람의 서늘함, 연잎 후드기는 혹은 가랑잎에 사그락대는 빗소리에도

한없이 펼쳐지던 상상의 날개는 어디로 갔을까. 산에 살면 산을

닮고 강에 살면 강을 닮는다는데 콘크리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을

닮아가고 있을까. 나의 눈과 귀, 가슴과 머리는 얼마만큼

콘크리트로 굳어가고 있는 것일까. , 온갖 나무들이 어울려

이루어낸 숲, 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영원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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