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앓으면서 자란다 / 손광성

윤소천 2015. 5. 21. 21:58

 

 

 

 

지난 일요일 대학 병원에 다녀왔다. 막내 처제가 첫딸아이를

입원시켰다는 기별을 받아서 였다. 성인용 침대에 누워 있는, 난 지 여섯

달밖에 안 된 갓난애의 표정은 잔잔한 듯 했지만 숨소리는 그렇지 못했다.

"이틀 내내 설사만 했어요. 제 탓인가 봐요." 그렇게 말하는 애 엄마가

앓고 있는 아기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내가 처제를 처음 본 것은 처제가

초등학교 3학년인가 되었던 해였는데, 동글납작한 얼굴에 아주

야무지게 생겼었다. 가끔 우리 집에 들렀다가도 애들 병치레로 시달리는 자기

언니를 보면, "난 결혼 같은 건 안할거야. 애들은 낳아가지고 고생이지.

"볼멘소리를 하던 처제였다. 그런데 그앳된 심술꾸러기는 어디로 가고 겸허한

얼굴의 한 '어머니'가 거기 서 있는 것이었다. "글쎄, 애가 굶는다고 따라서

굶어요. 울면 운다고 또 따라서 울구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아 계시던 시어머니 되시는 분의 걱정이었다.

 

그러니까 여나문 해 전이었다. 나도 이 병원에 어린 것들을

셋이나 한꺼번에 입원시킨적이 있었다. 위로 두 아이는 다섯 살과

두 살이었지만 막내는 난지 겨우 열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주사를 놔야겠는데 너무 어려서 도무지 혈관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이마에 커다란 주삿바늘을 꼿아야 했지만 그나마 여의치

않아 몇 번이고 바늘을 다시 찔러야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고, 그 울음소리는 멀리 처치실 밖에 까지 들렸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아내도 따라 울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내 눈에 비친, 밤하늘의 작은 별들도 모두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 때 였다. 나의 등 뒤에서

어떤 할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상심말아요. 애들이란

그렇게 앓으면서 자라는 거라우."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나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우리는 너무 상심해 있었기 때문에

그 때 할머니의 말씀이 별로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후 정말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위험한 고비에 부딪힐

때마다 그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의 한 마디가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그 때 마다 나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면서 혼자

생각했다. '아, 녀석들이 크려고 이러는 게로구나.' 병실 문을 나서면서

그 때 그 할머니가 내게 한 것처럼 나도 처제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애들은 앓으면서 크는 거래요. 너무 상심 말아요."

 

당장은 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생각나는 때가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밖은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쓰러질 듯 모로 눕는 가로수들, 몸을 구부리린

채 비바람을 마주 안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 건물에 걸린 채 비에

젖고 있는 붉은 현수막들, 그 밑에서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고 있는 비에 젖은

학생들의 열띤 모습들. 그런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앓으면서

자라는 것은 어린 것들만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요새 신문을 펴들기가

무섭다고들 한다. 연일 터지는 사건들이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도 우리 사회가 성숙하기 위해서

치러야하는, 애들 병치레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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