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일생 갚아야 하는 빚 / 이청준

윤소천 2015. 5. 14. 07:21

 

 

 

 

1960년대의 어느 해 겨울 밤, 인사동 근처에서 한 중학생

아이의 밤공부를 돌봐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주머니에 버스비가

없었다. 나는 도리가 없어 골목 입구에 손수레를 세워놓고 군밤을

팔고 있던 청년에게 사정을 말하고 버스비를 좀 꾸어 달랬다. 그 청년은

잠시 내 교복차림을 훑어보고 나서 당시의 버스비보다 많은 백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며 이렇게 당부했다. 이 돈 몇 푼 갚을 생각 말고 공부

열심히 하시오.” 이튿날 내가 그 돈을 갚았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이미 갚았더라도 사십년이 지난 오늘날에 까지 나는 여전히

그 빚을 짊어지고 사는 느낌이다. 그날 밤 그 청년의 한 마디가 그렇듯

무섭고, 섣불리 그 돈을 갚으려 드는것이 그에 대한 배신처럼

여겨졌을 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애초에 갚을 수 없거나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 수

없는 평생의 빚을 안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앞서 이야기처럼

작은 신세짐에서라도 그것을 쉽게 갚을 길이 없는 일에선

더욱 그런 마음의 빚이 쌓이기 마련이다. 내가 아직 독자의 존재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내던 삼십대 후반 시절

 어느 날, 비원 근처의 한 찻집엘 들어가 사람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때였다. 상대가 나타나면 함께 마시려고 나는 아직 차 주문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웬 차가 한 잔 날라져 왔다. 나는 어리둥절, 차를 잘못

가져온 게 아니냐고 물으니, 한 손님이 내게 차를 가져다드리라며

미리 찻값을 치르고 갔다는 대답이었다. 더 듣지 않아도 나는 그런 뜻을

알 수 있었다. 그 뜻이 고맙고 흐뭇하지 않을 수 없음은 물론,

이후부터 내겐 그 알지 못하는 독자 혹은 또 다른 보이지 않은 독자들에

대한 생각이 마음깊이 자리하게 되었고, 그 독자들의 소리 없는

격려와 질책을 되새기게 되곤 하였다.

 

글 잘 써, 이 친구야, 내가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어!”

얼굴 없는 독자와 차 한 잔이 내 일생의 문학의 짐을 지워준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정겨운 신세짐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더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가고 싶은 게 물론이다. 그리고 좀

주책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근자에도 나는 이따금 불가피한 경우를

당하여 되갚을 길 없는 평생의 빚을 지곤 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한 번은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며 잔돈이 모자라 만 원짜리를

요금함에 넣으려 하니 운전기사가 손을 저어 막았다. 종점 근처까지

가야하는 나는 나중에 차분히 정산을 하고 내릴 요량으로

자리로 가 앉아서 차 안이 좀 한산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차 안은

갈수록 붐벼댔고, 설상가상 나는 종점까지 다른 차를 타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앉아 있을 수도, 그냥 슬그머니 내려버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였다. 그 때, 그런 내 낌새를 짐작한 옆자리의 손이 거칠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천 몇 백 원 잔돈을 꺼내주며 어서 내려서

차를 바꿔 타라 일러왔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저 이 돈 다른

사람들을 통해 몇 배로 갚아드릴께요.’ 나는 다짐하고 차를 내릴 수

있었지만, 글쎄 이런 빚은 몇 배를 갚는다고 언제 다 갚아질 수 있을지.

 

다른 하루 저녁엔 잠실 종합운동장 앞을 지나가다 한 해전

부근에서 살면서 자주 들러 먹었던 김밥과 소주 생각이 나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음식을 받아놓고 보니 집에 갈 차비밖에

여윳돈이 없었다. 그래 그냥 음식을 되돌려주고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머리 수건의 함지박 아주머니가 그냥 드시고 갔다가 나중에 지나는

길 있으면 갚아줘도 좋고, 오실 일 없으면 말아도 좋다며 나를 주저 앉혔다.

나는 이번에도 염치없이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나 한 달쯤 뒤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시즌이 끝난 초겨울 녘이 되어 아주머니의

가판대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그 고마운

외상 빚을 갚을 길이 아주 사라지고만 것은 아니다. 봄 시즌이 시작되면

아마 아주머니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요즈음도 이따금 그 썰렁한

운동장 앞길을 지나며 이 겨울 따라 새봄을 기다려보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