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생활의 정 / 윤오영

윤소천 2015. 5. 16. 02:42

 

 

 

 

 

사람은 행복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맛에 산다. 추구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극히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또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산다. 사람은 그래서

다 같이 살아왔다. 옆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하구나 하면서도 자기만은 아직도 오래 살 것 같이 믿는다.

못 믿을 자기 앞만을 믿고 산다. 칠십이 넘어 수명의 바닥이 보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결코 내일이나 모레 죽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석에 누워서 이번에는 내가 필시 못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하면서도 아직도 십분

이십분 뒤라고는 믿지 않는다. 마지막 고비에서도 대개는

일분일초까지라도 저항하며 뻣대본다. 만일 사람이

완전히 행복한 위치에 놓여있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더 추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사멸(死滅)이다.

또 기막힌 곤경에 처해 있을 때는 이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을 느낄 것인가. 그러므로 행복이란

결국 한 마디로 해서 ()의 의지에서 오는 것이다.

 

기쁨이란 얻었을 때의 감정이요, 슬픔이란 잃었을 때의

감정이다. 크든 작든 시시각각으로 얻고 잃고 기쁨과 슬픔으로 무늬를

짜가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의 바닥에는 우리의 힘으로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지혜로 헤아리지 못하는 심연(深淵)의 바다가

흐르고 있다. 이 심연의 해저(海底)에 부딪칠 때 비로소 무상(無常)

대비(大悲)를 느낀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슬픔의 바다 위에 떠가는

한 마리의 고기다. 그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도

치고 유유(悠悠)꼬리를 젖고 노닐 수도 있다.

 

장자(長子)의 소요유(逍遙遊)에서도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나의 천박한 감상이 장자의 심오(深奧)한 심경(心境)

엿보기에는 너무나 피상적(皮相的)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양적인

달관(達觀)에서 오는 즐거움 속에는 이런 기미(氣味)가 다분히 용해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너그러울 수만은 없다.

현실은 좀 더 쓰라리고 짜릿하다. 괴로움이란 결코 무의미한 것도

아니요, 안이(安易)것도 아니다. 실재(實在)란 거부함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도피함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또 괴로움과 슬픔을 떠나 기쁘고 즐거움만이 남는 것도 아니요,

달고 기름진 것만이 맛일 수도 없다. 메는 단맛에 캐먹고,

쏙새는 쓴맛에 캐 먹는다. 달고 쓴 것이 다 맛인 거와 같이 슬프고

기쁜 것이 다 정()이다. 정을 떠나서 생활이란 따로 있지 않다.

 

글은 인생의 문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슬픔과 기쁨 즉 눈물과 웃음의 얼룩진 무늬라는 뜻으로 받아드린다.

그리고 슬픔과 기쁨을 그대로 느끼며 삼킬 대로 삼키고,

씹을 대로 씹어가며 살아가고 싶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쓴맛 단맛을

사양 않고 있는 대로 알뜰히 맛보며 짙은 눈물 속에서 생활을

추구해 보려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며 서로 웃고 울어주는 이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즐거움은 없다. 나는 홀로 산길을 걷다가 기이(奇異)

돌 틈에서 흐르는 맑은 샘을 보고 문득 좌우를 돌아다본다.

 

이 아름다움을 혼자 보기가 외로워서다. 험한 비탈에서

몇 번을 넘어지고 위기일발(危機一髮)의 모험을 겨우 벗어나

천신만고(千辛萬苦) 겪은 뒤에 정상에 서서 승리의 쾌감을

맛볼 때 문득 뒤를 돌아본다. 신고(辛苦)의 쓴 경험과 이 정복의

쾌감을 누구에겐지 말해주고 싶어서다. 다시 협곡(峽谷)

무수히 지나 거의 산궁수진처(山窮水盡處)다 달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짙은 외로움에 잠겨 지탱을 못할 때, 바로 머리 위

절벽상(絶壁上)고인(古人)의 각자(刻字)의 흔적을 보고, 미칠 듯

반가워서 엉긴 덩굴을 헤치고 각자를 읽어본다. 주인의 성명도

전하지 않는 그 시구(詩句)가 내가 얻은 직감과 거의 일치함을

 발견할 때, 문득 눈물을 씻는다. 반가워서다.

 

옛 사람의 글을 읽고, 남의 글에 취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아닌가. 위대한 철리(哲理)만이 아니요, 고상한 설교(說敎)만이

아니요, 반드시 실리(實利) 실익(實益)을 위해서 만이 아니다.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우졸(愚拙)하면 우졸할수록 생활에 핍진해 오는

것이다. 흔히 수필을 문장 중에서도 보람 없는 잡록(雜錄)의 하나로

여기거니와 따지고 보면 글 중에서는 가장 엷은 문장이면서

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짙은 자세(姿勢).

 

사람마다 다 위인이 될 수도 없다. 생활마다 다 행운에 젖을

수도 없다. 그러나 허위를 버리면 순정이 있다. 인생행로(人生行路)에는

슬픔과 기쁨이 있다. 순정은 슬픔에 솔직하고 기쁨에 솔직하다.

따라서 눈물과 웃음이 있다. 눈물과 웃음의 아롱진 무늬, 이것이

인생의 문체다. 인생의 발자취요 역사의 여흔(餘痕)이라고 해도 좋다.

행복이란 별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생의 의미인 동시에 짙은

생활에서 오는 맛이요 정이다. 나는 슬프기에 슬퍼했고 슬펐기에 울었다.

 

나는 기쁘기에 기뻐했고 기쁘기에 웃었다. 이것이 진솔이다.

여기에는 조작이 없고 수식이 없고 어떠한 의도에서 오는 불순이 없고

자기를 거만하게 높일 필요도 없고 자기를 비굴하게 낮출

필요도 없다. 증오와 애호를 뛰어넘는 정, 여기에 새로운 인생의 맛을

느낀다. 그리고 새로운 탐색과 추구의 실마리를 잡는다. 이것은 하나의

음미(吟味), 모색(摸索)이요 또 생활의 창조이기도 하다. 진실한

생활이란 이것이 아닐까. 순박한 정서란 이것이 아닐까. 옥우(屋隅)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적 생활이란 또 이것이 아닐까. 비록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죄 없는 심정이요, 눈물겨운 인간의 조그마한

행복이요, 향기인 것만은 부인(否認)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