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중에 백초가 가을 들어 다 졌다마는 뜰 앞에 결명화決明花는
안색도 고운지고 雨中白草秋欄死 階下決明顔色鮮 ” 송죽이나 국매菊梅는
모르는 이 없지마는 뜰 앞의 결명초는 아는 이가 드물다. 바람 속에
서서 향기를 맡아보며 눈물을 흘린 사람은 오직 두자미杜子美가 아니었던가.
“ 임풍삼후형향읍 臨風三嗅馨香泣 ” 이란 낙구落句가 그것이다.
범인凡人은 살기 위하여 드디어 저를 죽이고 위인은 한 번
죽음으로써 영원히 산다. 그러나 위인의 일생이 반드시 다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생활에는 결함도 많고 과오도 많을 수 있으며 식견이나 재능도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다. 오직 의義를 위하여 이利를 버리고 진眞을 위하여 생을
끊은 최후의 일거가 길이 천추에 빛나는 것이다. 이것을 누구나 경모하면서
행하기가 어렵다. 저마다 송죽이 못되고 저마다 국매가 될 수 없는 것이 여기 있다.
그러나 한미한 일생을 초야나 시정에 묻혀 살다가 소리 없이 가버린 사람들
중에도 굳은 신조와 맑은 심경으로 영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속에 흔들리지 않고
양심을 등불 삼아 자기 충실에 노력하다가 간 사람들도 위대한 사람들이다.
비록 불의와 정면투쟁은 못했을망정 항쟁의 양식良識은 마비된 적이
없고 비록 곤궁에 빠질망정 재才를 농弄하여 공리功利를 탐하거나 시세에 영합하여
지조를 굽히는 일이 없이 즐거운 여유 속에 노력을 기울여가는 생활태도도
또한 거룩하고 향기롭지 아니한가. 뜰 앞의 결명초와 같은 무명인의 진실, 이것을
가리켜 위대한 서민이라 하면 지나친 말일까.
내가 소시 시골 살 때, 목중牧中노인에게서 받은 인상은 크다.
그의 내력을 아는 이 없으나 사림 측에서는 목중이란 호로 불려 졌고, 마을 사람
사이에는 김 생원으로 불러져 왔다. 그는 시장에 가면 행상이요,
부락에 가면 독농篤農이요, 무릎을 꿇고 앉아 학동을 가르치면 훈장이며 학자였다.
큰 사랑이나 시회에 참석하면 박학준론博學峻論과 시사문필詩詞文筆이
일좌를 풍미했고 온후하고 호탕한 풍치는 난만한 춘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토막집에 들어서면 지필과 몇 권의 서책 외에는 씻은 듯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큰 산 나무를 해서 이 십리 길이나 되는 시장에 가서 팔아 왔다. 옷을
갈아입고 정좌하고 앉아 5,6명 학동에게 글을 가르치되 강미 돈을 받은 일이
없었다. 호박 한 개, 계란 한 개를 큰 재물 같이 아끼는 규모지만 이웃이나 남의
일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는, 선선하고 활해서 애체할 대가 없었다.
생활은 항상 기갈을 면할 정도에 그쳤으나 마음은 항상 만족하고 유연한
모습이었다. 어느 재경 지주가 마름(토지 관리인)을 봐 달라고 교섭을 하자
“산에 도토리가 없나 강에 물고기가 없나, 이만하면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는데 내가 왜 남의 마름을 보느냐”고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옆에서 듣던
사람이 “마름만 보면 생활이 당장 넉넉해질 것을 왜 거절하느냐?”고 묻자
“제 땅을 가지고도 앉아서 남이 진 농사로 호강하는 것이 가증하거든,
날 더러 남의 땅 가지고 호강하란 말이요”하며 웃었다. 괴롭다거나 생활이
어렵다고 걱정하는 말을 들으면, “괴로울 입장에 앉아서 괴로운 것이
싫으면 죽겠다는 말이고, 가난한 입장에 앉아서 가난한 것이 싫다면 도둑질할
생각이 있다는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타일렀다. 남의 잘못을 말하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남더러 군자가 되고 애국자가 되라는 말인데, 세상 사람이
다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는 거야. 남의 잘못을 보고 남을 나쁘니 좋으니
하고 가르기 시작하면 패를 짓고 편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이조 당쟁도 여기서
유발된 것이다. 남의 잘못보다는 항상 내 잘못에 밝아야한다”고 타일렀다.
명주 옷감을 세찬으로 가져온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것을 입을 자격이 못된다. 내가 이것을 입고는 밖에 나가지를 못한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남 앞에 비단옷을 입고 나서니. 예전에 나보다
공부와 학행이 높고 뚜렷한 분 중에는 나보다 더 못 입고 더 굶주린 분도 많았고,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 나라를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는
사람에게 죄송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다 복에 과한 사람들이다. 상제가 명주옷을
입으면 남이 흉보지 않은가. 나라 뺏긴 사람이 명주옷 입으면 죄로 간다.
너 내말 알아듣겠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문자 알지?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너는 이담에 뚜렷하게 비단옷을 입고 댕기도록 공부해라”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의 가슴속에 항상 무엇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관청에 다니는 청년이 입버릇처럼 늘 왜놈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그 놈 밑에 월급 생활은 하지만 하루도 몇 번씩 울화가
치밀어서. 이것이 다 나라 없는 설움 이지요” 하며 일본 사람 닦아세운
영웅담을 늘어놓는 이가 있었다. 그가 간 뒤에 이렇게 말했다. “이 다음에
저런 애국자를 경계해야 한다. 차라리 친일파는 무섭지 않다. 저런
애국자가 무서우니라. 남도 애국자로 보고 제 자신도 애국자로 지칭하는 사람들.
그가 울화가 치민 것은 가봉加俸이 부럽고 일본 사람 자리가 부러운 거다.
이 다음에 독립이 되어서 그런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차라리 일본 사람만 못하지.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려야지!” 나는 그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막걸리 안주는 풋고추가 제일이야!”
풋고추는 그의 단골 안주였다. 가끔 눈에 선한 허연 수염과 우뚝 솟은 콧날.
길고 흰 눈썹의 목중노인. 그리고 굵은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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