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마당이지만, 가을이 깊으니 텅 비어있다. 꽃 욕심이
많아 해마다 봄이면 빈자리 없이 일년초를 사다가 심곤 한다. 올해라고
뭐 달랐겠는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가을 늦도록 피는 백일홍과 취꽃
(취나물꽃은 자생해서 자라 여기저기 제 스스로 알아서 번져나가는 것으로서
일년초가 아니다), 베고니아가 흐벅지게 피어 있었는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밤을 보내고 나서 뜰에 나가보았더니 모두 식초에 담가낸 것처럼
흐물흐물 무너져 있다. 보기가 싫어 모조리 뽑아 허드레 자루에
눌러 담는다. 마음속에서 쏴아 하고 바람 소리가 난다.
추억이 없다면 쓸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을 터이다. 폭풍우가 지난 듯
휑뎅그렁한 마당 가운데 혼자 앉아 있으니까 봄부터 늦가을 까지 애면글면,
나와 만나고 나와 관계 맺고 나와 함께 놀던 갖가지 꽃들이 떠오른다.
시작은 뜰의 남쪽 끝단을 차지하고 있는 매화나무였을 것이다. 너무 예쁜
매화꽃이 너무 빨리 지는 게 가슴 아파, 날씨가 아직 쌀쌀 한데도
불구하고 매화 꽃비를 맞으면서 ‘곡주’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담뿍 취했던
날들이, 눈에 선하다. 소나무 밑의 진달래, 개나리가 그 다음에 피고,
목련이 피고, 철쭉들이 다투어 벌어졌었지. 몇 년 전 아는 사람이 우리
꽃이라면서 구해다준 앵초, 하늘매발톱, 돌단풍, 제비꽃, 삼지구엽초가
제 몫몫, 꿈같은 앞날을 준비하고 있던 봄에, 나는 이탈리아 봉선화와
베고니아와 활연화를 스무 상자나 사다 심었고, 백일홍 씨도 뿌렸다.
가뜩이나 비좁은 뜰이라서 다년생 꽃만으로도 뜰이 다 차고 넘칠 텐데,
왜 일년초를 그리 많이 사와 기왕에 터 잡은 다른 꽃들까지
괴롭히느냐고, 함께 사는 늙은 ‘여자 친구’가 타박을 하던 말도 새롭다.
그녀는 내게 그리 타박을 했으면서, 얼마 후엔 일 미터나 웃자란
부용 꽃나무를 다섯 그루나 얻어왔다.
어떤 꽃은 계속피고 어떤 꽃은 계속 졌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피고 지는 꽃이 시간 속을 흐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 먼저 뜰로 나가
새로 벙글어진 꽃들을 찾아보는 게 제일 행복한 일과였다. 그늘 속에만
있는 것은 햇빛이 드는 쪽으로 옮기고, 너무 바투어 자리 잡은 것은 사이를
벌려주었다. 뜰에만 나와 있으면 과장하건대,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원고도 쓰고 싶지 않았다. 젊을 때 살던 시골집 마당에도 더러 꽃나무가 있었지만,
꽃이 이렇게 예쁜 줄을 몰랐다. 다른, 젊은 욕망들이 내 주인인 것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꽃뿐인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예쁜 게 너무도 많다. 평생 곁에 두고 사용하면서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재떨이조차 어느 날 다시 보니 예쁘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주인이 다시 집어들 날을 기다리고 있는 묵은 책들도 예쁘다. 읽고자
책을 펴드는 게 아니라 다소곳이 내 손길을 기다리는 그것들이
단순히 ‘예뻐서’ 책 한 권 한 권을 빼보는 날도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꽃만 예쁘고 풀은 예쁘지
않겠는가. 풀은 예쁘고 나무는 예쁘지 않겠는가. 온갖 짐승도 다 그렇다.
예전에 미운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미운 것은 잘 안 뵈고
예쁜 것 만 먼저 뵌다. 얼마 전까지 미웠던 사람조차 다시 보니 예쁜 게,
참 이상하고 오묘하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눈물겹다.
책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게 아니다.
누가 새삼 훈계를 해서 변화 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경험의 축적에
의한 변화도 아니다. 저절로 예까지 오고 만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시간이 나를 태워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비와
불심이라는 게 뭐 따로 있겠는가. 시간을 쫓아 발에 물집이 생길 만큼 걷고
걸었더니, 어느 날 자비심 같은 것이, 사물에 대한 애닮은 연민 같은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세상 만물이 다 예쁘다고, 이를테면
마음의 눈을 띄어준 셈이다.
예쁜 것의 으뜸은 사람이다. 사람처럼 추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독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불쌍한 것이 없고, 그리고 사람처럼
예쁜 것이 없다. 사람 속엔 무엇보다 사랑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
그럴 터이고, 사람만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또 눈물겹겠는가.
가을의 뜰은 존재의 멸망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뜰을 서성거리면서 멸망에
이른 꽃나무들의 그루터기를 본다. 어떤 꽃들은 내년 봄에 다시
필 테지만, 어떤 꽃들은 조그만 그루터기조차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싹을 틔워
꽃을 피어올린다고 내년 봄의 그 꽃이 올해 핀 그 꽃이 아닐 터,
멸망이 불러온 최종적인 것은 텅 빈 것, 이를테면 허공일 뿐이다. 부처님이
말한 본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멸망이 불러온 허공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윽고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제일 눈물겹고 예쁜 것은, 어쩌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나무들이 울울창창 뻗어나던 봄과 여름의 뜰이 아니라, 지금의 텅 빈, 멸망의
뜰일지 모른다. 자본주의적 세계경쟁이 불러오는 헛된 안락과
상대적인 소외의 비명소리가 울울창창한, 오늘날의 세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멸망의 아름다움을 잊기 쉽다. 그러나 텅 빈 뜰을 보라.
나뭇잎이 다 떨어진 황량한 산야를 보라. 가파른 경쟁의 밀림을 숨 가쁘게
내달리다가 지금 어깨를 웅크리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당신의 그림자를 보라. 가장 눈물겹고 예쁜 것의 본체가 거기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 홀로 있을 때 확인해야 하는 것은 멸망의
아름다움이다. 그 쓸쓸한 망명정부 같은,
또는 허공을 닮은, 가을의 뜰이 내게 그걸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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