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봄 春 / 주자청

윤소천 2023. 11. 22. 11:17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바람이 불어온다. 봄의 발걸음이

다가선 것이다. 천지만물이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흔연히 눈을 뜬다.

산은 산뜻함으로 윤기가 돌기 시작하고, 강물도 세차게 흐르기

시작하고, 태양의 얼굴 또한 빨갛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여리고 푸른

새싹들이 살며시 땅을 비집고 돋아나온다. 정원에도 들판에도

 온통 갓 싹이 돋아난 풀들로 가득하다.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고,

딩굴어도 보고, 공을 차기도 하고, 달려도 보고, 숨바꼭질도 해본다.

 

바람은 가볍게 살랑거리고 풀은 솜털처럼 보드랍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배나무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앞 다투어 꽃을 피운다.

붉은 꽃은 불덩이 같고, 분홍 꽃은 노을 같고, 흰 꽃은 눈송이 같다. 

  향긋한 꽃내음을 느끼며 눈을 감으니 나뭇가지마다 벌써 복숭아 살구

배가 주렁주렁 열린 듯싶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핀 꽃을 찾아

모여든 수많은 꿀벌들이 윙윙거리고, 크고 작은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그 밖에 들꽃이 여기저기 만발하다. 이름 있는 것,

이름 없는 것 등 가지각색의 들꽃이 꽃더미 속에 흩어져 눈처럼

별처럼 반짝반짝 수놓고 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쳐도 차갑지 않네. 버드나무를 흔드는

봄바람이기에’ 라고 하였듯이 따뜻한 봄바람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그대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다. 바람 속에 묻혀 온 상쾌한 흙내음은

싱그런 풀내음과 온갖 꽃향기가 뒤섞인 채 약간 축축한 공기 속에

온양醞釀되고 있다. 새들은 꽃잎이 무성한 가지에 둥지를 틀고서

기뻐하기 시작한다. 친구며 짝궁을 불러 모으려는 듯이 맑고 고운 소리를

뽐내며 완만하게 노래를 불러댄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봄바람과

봄여울과 한데 잘 어우러진다. 소 등에 타고서 불러대는

목동의 피리 소리도 온종일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비는 늘 내리는 것으로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2,3일

계속해서 내린다. 그렇다고 짜증내지 마라. 가만히 보면 그것은

쇠털처럼, 자수바늘처럼, 혹은 가는 실처럼 촘촘하게 뿌려지고

있지 않은가. 인가의 지붕 위에는 옅은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다.

나뭇잎은 더욱 푸른 빛깔을 띠고, 새싹도 그대의 눈을 부시게 할

정도로 푸르다. 저녁 무렵 전등을 켜자 아스라한 노란 불빛이

 고요하고 평화스럽기만 한 이 밤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시골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조그만 길 돌다리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채 일하는 농부도 있다.

그들의 초가집에도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가운데 적막함이 깊어만 간다.

 

 하늘에는 연이 많아지고, 지상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든다.

도시나 시골이나 집집마다 남녀노소 모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둘러

나온다. 각자 몸의 근육과 관절을 풀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간다. ‘일 년 계획은 봄에 있다’고 했다. 이제 막 시작했으니

얼마든지 시간과 희망이 있는 것이다.  봄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선한 채 새롭게 성장해 가는 것. 봄은 아리따운

처녀처럼 꽃단장을 하고서 미소 지으며 걸어가는 것. 봄은 건장한

청년처럼 무쇠 같은 팔뚝과 허리와 다리로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

 

( 1933년 2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