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은 마음이 퍽 심란하였다. 오늘 밤 정원에서 바람을
쐬다가 불현듯 날마다 거닐었던 연못이 생각났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는 뭔가 색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다. 달은 점점 높이
떠오르고 담 밖 한길가의 떠들썩한 아이들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내는 방안에서 윤아閏兒의 등을
다독거리며 잠재우고 있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응얼거리고 있다. 나는 슬그머니 겉옷을 걸치고 문밖을
나섰다. 연못을 따라 구불구불 굽어진 조그마한 길이 하나
나있다. 호젓하고 깊숙한 이 길은 낮에도 인적이 드물고
밤에는 더욱 적막함이 흐른다. 연못 사방으로 수많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길 한쪽으로 대부분 버드나무들이고,
그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달빛이 없는
밤이면 무서운 느낌이 들만큼 음침하고 으슥하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다르다. 희미해져가는 달빛 아래 무척 분위기가 정겹다.
지금 길에는 나 한 사람뿐이다. 혼자 뒷짐을 지고서 한가로이
걷고 있다. 이 세상이 온통 내 것처럼 느껴진다. 일상의 나를 벗어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 같다. 나는 떠들썩한 열기를 좋아하고,
또한 차분한 고요를 좋아한다. 그리고 군중들과 함께 하는 것도
사랑하지만 혼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한다. 오늘 같은 밤, 이 창망滄茫한
하늘 아래 나는 뭐든지 다 생각할 수 있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나 자신이 무한한 자유인임을 느낀다. 낮에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을 지금 이 순간에는 모두 접어두었다.
혼자 있는 기쁨의 묘미를 저 끝없는 연꽃 향기와 어슴푸레한 달빛과
더불어 누린다. 구불구불한 굽이진 연못 위로 연잎들이 파랗게
수면 가득 덮여 있다. 물에서 우뚝하게 높이 솟은 연잎은 꼿꼿이 세운
무희의 치마 같다. 겹겹이 포개진 연잎 사이로 간간이 하얀
꽃송이가 맺혀있다. 더러 탐스럽게 피어 있거나 부끄럽게 곧 피어날듯
한 꽃망울은 마치 알알이 나뒹구는 진주 같고, 파아란 하늘의
반짝이는 별 같고, 또 방금 목욕하고 나온 뽀얀 미인 같기도 하다.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맑은 향기가 마치 저 멀리 높은
누각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노랫소리처럼 전해져 온다. 이때 연잎과 연잎
사이에 미세한 떨림이 번개처럼 일더니 금새 연못 저쪽으로 물결쳐 간다.
원래 어깨를 나란히 하듯 촘촘히 붙어 있던 연잎에 짙푸른 물결의
무늬가 완연했다. 연잎 아래로 소리 없이 흐르는 물은 수많은 잎사귀에 가려
어떤 빛깔인지 알 수 없지만 연잎은 도리어 더욱 돋보이고 운치가
있는 것이다. 달빛은 흐르는 물처럼 고요히 연잎과 연꽃에 쏟아지고 있다.
희미하게 옅은 안개가 연못에 피어오른다. 연꽃과 연잎은 우유로
씻은 듯하고 또한 얇은 망사에 가려진 꿈만 같다. 오늘 밤은 비록 만월滿月이지만
하늘에 잿빛의 층을 이룬 구름이 떠 있어 환히 비추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가 좋다. 단잠을 자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어설프게 조는 것이
오히려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있다고나 할까. 빛이 나무 사이로 비춰
들어온다. 높은 곳에 무성하게 자란 관목灌木위로 어슴푸레 얼룩거리는
검은 그림자는 차가운 기운이 들만큼 으슥해 흡사 귀신이 어른거리는 듯싶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연잎 위로 버드나무의 그림자가 띄엄띄엄 가늘게
늘어져 있는 것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다. 오늘 밤 연못가에
달빛이 환히 고르게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달빛에 잠긴 연못가의
빛과 그림자가 잘 어우러졌다. 그 조화를 이루는 선율은 마치
바이올린 선상에서 흘러나오는 명곡 같다.
연못 주변은 나무로 가득 뒤덮여 있다. 멀리 혹은 가까이 높고
낮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가운데 버드나무가 가장 많다.
버드나무가 이 연못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오솔길 한쪽으로 몇 군데 빈자리가 나 있다. 그 공간은특별히 달빛을
위해 남겨둔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 빛은 한결같이 어두침침하다.
언뜻 보면 희뿌연 안개가 한데 엉긴 안개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독
버드나무만이 안개 속에 자태를 빛내고 있다. 나뭇가지에 먼 산이
어슴푸레하게 걸려있는 듯한데 윤곽만이 그려질 뿐이다. 그나마 나무
틈새로 새어나오는 한두 개 가로등 불빛도 졸음이 가득한 눈처럼
또렷하지 못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활기찬 것은 나무숲의 매미 소리와
연못 속의 개구리 소리뿐이다. 활기를 띠고 있는 자연의 생명들과는
달리 나는 한가롭기만 하다. 문득 채련采蓮에 관한 고사가 생각났다.
채련은 강남江南 (양자강 하류 이남의 지역) 일대의 옛 풍습으로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했다. 이를 시가詩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채련은
주로 어린 소녀들이 한다. 아리따운 그녀들은 조그만 배를 타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떠난다. 연을 따는 소녀들도 많지만 구경하는 구경꾼들도
척 많다. 이것은 정겹고 흥겨운 하나의 풍류였다. 양원제梁元帝의
채련부採蓮賦에 잘 나타나 있다.
于是妖童媛女,
蕩舟心許.
鷁首徐廻,
兼傳羽柸,
櫂將移而藻挂,
船欲動而萍開.
爾基纖腰束素,
遷延顧步.
夏始春餘,
葉嫩花初,
恐沾裳而淺笑,
畏傾船而歛裾.
장난스런 소년, 아리따운 소녀들이
배 띄우며 서로에게 마음 전한다.
뱃머리 천천히 돌려
날개 깃 술잔을 건네주며
노를 옮기려자 물풀이 달라붙고
조각배 움직이니 개구리밥 갈라선다.
가느란 허리를 하얀 띠로 동여매고
물러서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이른 여름이나 봄 기운은 남은 듯
연잎은 야들야들 꽃은 막 피어
치마에 물 튈까 배시시 웃고
조각배 기울까 옷섶을 추스른다.
당시 노닐던 광경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흥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누릴 복을 잃었다.
다시 <서주곡西州曲>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采蓮南塘秋
蓮花過人頭
低頭弄蓮子
蓮子淸如水
남쪽 연못에서 가을 연꽃 따려니
연꽃 키는 사람의 머리를 훌쩍 넘겨 버렸다.
고개 숙여 연밥이나 가지고 놀려니
연밥은 맑기가 가을 호수 같다
오늘 밤 누군가 연꽃을 딴다면 이곳의 연꽃도 ‘사람의 머리를
훌쩍 넘겨버렸다’ 고 할 수 있다. 다만 수면에 흐르는 그림자를 볼 수
없으니 안되겠구나. 이래서 나는 강남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불쑥 치켜드니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내는 이미 깊이 잠든 것 같다.
( 1927년 7월 북경 청화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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