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冊’ 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이 보온만을 위한 세기世紀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늘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서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 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버리는 날은 그때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 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버리는 것도 있다. 이러한 나도 남의
책을 가끔 빌려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 논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 권을 빌려보고 999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에 도적은 도적이다.
책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 권에서 999권을 돌려보내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주는 자나 책에 있어서는 다
도적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책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은 감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책은 물질 이상이다.
영양令孃이나 귀부인을 초대한 듯 결코 땀이나 때가 묻은
손을 대어서는 실례다. 책은 세수를 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菱花紙처럼
부드러워 한 손에 말아 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態로 돌아가는 인종忍從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
이태준李泰俊( 1904~? ) 호는 상허尙虛 소설가, 수필가.
정지용 이효석 김기림 이상등과 구인회를 만들어 일제하의
한국문학을 이끔. 1946년 월북, 대표작으로 <해방 전후>
<사상의 월야> 수필집 <무서록>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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