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온돌의 정 / 윤오영

윤소천 2014. 1. 16. 10:47

 

  

                                              온돌의 정

 

 

 



 

 눈이 펄펄 날리는 벌판을 끝없이 걷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불을

끄고 희미한 창문을 바라본다. 그러면 소창素窓 밖에서 지금 끝없는 백설이 펄펄

날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밤에 말없이 다소곳이 앉은 여인과 있어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화로에 찻물을 올려놓고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바글바글 피어나는 맑은 향기에서 고운 여인의 옥양목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끝없이 아득한 옛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골통대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그러면 선향線香 같이 피어올라 안개 같이 퍼지는

속에서 아득한 옛날의 전설이 맴도는 것이다. 달밤에 호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나는 한길로 난 들창을 열고 넓은 터를 내다본다. 그러면 높은 외등이

달빛같이 비쳐 광장에 호수같이 고여 있는 것이다.

 

 혀끝으로 다향을 음미하며 책상머리에 앉으면, 누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며

찾아올 것만 같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잊었던 옛 친구를 생각한다. 서랍을

열고 묵은 원고를 들춰, 다시 읽어보면 옛 얼굴이 목화송이처럼 떠오르고.

 책은 손때 묻은 책이 정겨웁고, 붓은 손에 익은 만년필이 좋다. 여러 번 읽던 책이

 옛 친구같이 반갑고, 전의 즐거웠던 기억이 새로우며, 손에 익은 붓이 하얀 원고지

 위에 솔솔 흘러내리는 푸른 글씨가 나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방은 넓지 않아

오히려 아늑하고, 반자 무늬는 약간 그을은 것이 오히려 그윽하다. 천길 만길 깊이를

 모를 해저, 구만리 창공 끝없는 허공이 그리운 때면, 나는 베개 위에 고요히

 누워 눈을 스르르 감아보는 것이다.


 “두 사람이 대작하매 산꽃이 핀다 兩人對酌山花開.” 친구와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싶고, “홀로 경정산에 앉다 獨坐敬亭山.” 산악이 그리운 때면,

책상머리에 도사리고 앉아 책갈피를 제쳐가며, 회심의 글귀와 쾌재의 문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 한 칸 온돌방의 정서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왕유나 도연명의 경지를 얻지 못하여, 白香山(白居易의 호)의 세간에 대한

 관심과 완사종阮嗣宗(阮籍의 자)의 미친 버릇을 버릴 길이 없어, 때때로

뛰쳐나와 가로수 밑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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