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할머니들의 말씀 / 김수봉

윤소천 2014. 1. 19. 14:00

 

 

 

 

 

 할머니의 말씀들은 살아온 삶의 철학이다.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는 무심결엔 듯 바람결엔 듯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 말씀들은 어느덧 내 귀에 박혀들어, 이제 와서

되새겨보면 모두가 철학적이었다. 그 시대로선 드물게 장수하신

아흔의 나이,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건강했고 맑은 정신을 지키셨다.

 

그것은 어떤 비방을 써서도 아니요 보신을 위해 특별히 

무엇을 잡수신 것도 없었다.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욕심이 더 생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느니라. 내 배 다 채워놓고 남 주간디,

내 배 덜 채우고 남 줘야 공이 되는 거이제. 잣대는 열 번 대야하고

가세(가위)는 한 번 대느니라. 이런 말씀들에서 나는 빈곤을

이겨내는 작량도 남을 배려하는 도리도, 경망스러움과 신중함이

무엇인가도 조금씩 깨우쳐온 것이다. 내가 가끔 형제들과 싸우고

동생을 울려놓을 때도 당신은 호되게 야단치는 일이 없었다.

그 대신 등을 토닥여주며 ‘동생한테 아망을 부리면 되간디, 아망은

 네 맘부터가 먼저 궂어지는 게야.’라고 조용조용 타이르셨다.

 

 할머니 가신 지 어언 사십년 , 나도 이 나이 들어가면서

할머니의 말씀들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일이 많아졌다. 에릭슨이

말한 것처럼 인생의 노년기는 통합성의 시기이며 지혜의

시기이어서 일까. 나는 요즘 TV에서 시골 노인들이 나오는 프로를

자주 본다. 젊은 사람들이 다 떠난 시골. 일흔이 넘고 여든을

넘긴 할머니들끼리만 사는 오늘의 농촌. 자연의 일부 그대로

살아가는 일상을 꾸미지 않고 보여줘서 좋다.

 

 이 할머니들도 지난날 우리 할머니처럼 결코 높은 교육을

받았거나 수양을 쌓았거나 서책을 읽어서 얻어진 지혜는 아니다.

그저 70~80년 세월을 들밭과 산자락에서 혹은 개펄과 

함께 살아오면서 얻어진 예지이며 삶의 철학이다. 곱씹어볼수록

어설픈 내 학식이 외려 무르춤해지는 말씀들이다.

 

 천지 만지가 다 꽃인디, 여기 사람들만 쭈그렁 낙엽이여.

화사하게 꽃들이 흐드러져가는 봄날, 노인들만 남아있는 세태를

이렇게 풀어내는 것이다. 한번은 방송을 진행하는 기자가,

‘그래도 아직 들 일 잘 하시고 건강 좋으시네요. 무슨 건강 비법이라도?...’

하고 묻자, 비법은 무슨..., 일은 놀이처럼 하고 밥 먹기는 일처럼

해야 혀, 그러면 탈이 없어지는 거여, 라고 답한다.

 

 심지가 깊은 이런 할머니들의 말씀을 좀 더 옮겨본다.

여자는 철들면 시집가는디, 사내들은 철들면 죽어뿌러. 가난한

거이 불행이 아니어,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제.

‘복이다 복이다’ 하고 살면 참말로 복이 되어 돌아오는 거여. 여편네들

잔소리 같은 것이 장맛비라는디, 저 먹구름 언제 좀 걷힐까이.

내 곁에 사는 사람들이 다 내 거울인 거여, 그 얼굴들 보면 내 얼굴도

내마음도 다 보이제. 자식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만 걱정인줄

알았등만. 여우살이(여의살이) 시켜나도 마찬가지드라고...,

 

 이런 할머니들의 말씀을 새겨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나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대학공부도 하고 학위라는 것도 따서

전문지식께나 갖췄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품

같은 지식으로, 틀에 박힌 그 안에서 사고하고 풀어먹느라고

나불거렸을 뿐이다. 할머니들이 평생을 온 몸으로 채득한

철학에 비하면 더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남은 것이 ‘참앎’이라 하였듯 나는

체화되지 않은 지성에 끌려다니고만 있었는지 모른다.

 숙연히 생각하면서 할머니들이 흥얼거리던

남도가락도 되뇌어본다.

 

  영감아 땡감아 죽지를 말아라./ 봄보리 개떡에 꿀 발라줄게...,

 사내끼(새끼) 백발은 쓸디나 있어도/ 요놈의 백발은 쓸디도 없네...,

 

 전라도 진도의 외딴 갯마을에 사는 여든 일곱 살 할머니의

치아는 하나도 안보였다. 노랫가락이 끝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몽당백발에 합죽한 입과 우묵한 볼을 보는 내 가슴이

시리도록 저려왔다. 찢어지게 가난하기만 했던 시절, 보릿고개를

못 넘기고 먼저 세상을 뜬 영감을 생각하고, 보리 풋바심

개떡에 없는 꿀이라도 발라 먹여서 살게 하고 싶었던 할머니의

간절한 소망이 선연히 보여서다. 할머니의 가락은 세상 그 어떤

시구보다도 내 가슴에 찌르르 와 닿았다.

 

 청명한 햇볕과 짙어만 가는 푸르름 속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 안고 멀어져 가는 꽃상여를 배웅하였을 젊은 날

할머니의 초췌한 모습이 겹쳐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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