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생활과 행복 / 윤오영

윤소천 2023. 11. 21. 22:54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해먹고 집안 치우고 빨래하고

살아가기가 바빠서 아무런 오락이나 향연의 여유도 없이 판에

박은 듯한 생활을 되풀이하는 가난한 한국인의 생활을 보고,

어느 미국 사람이 “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재미에 왜 사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텔레비전이 있고 냉장고가 있고 자동차가

있는 문화 주택에 사는 미국 사람이 생활고에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어느 한국 사람이 “그것은 너무 복이 과해서 죽은 것이

아닌가. 그런 부자나라에서 자살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얼른 생각하면 서로 당연한 생각들이다.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저마다 행복한 생활을 희구하고 했건만 행복하지를 못했다.

예전에 어느 호강하는 대신이 달밤에 시골 산모롱이를

지나다가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늙은 부부가 젊은 며느리 내외와 어린

손주를 놓고 재롱을 보며 웃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단란한 모습을

 보고, 그 행복이 부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막살이의 행복이 대신의 부귀보다 더하지 아니한가.

 

 속세를 버리고 깊은 산중에 들어간 한가한 도승道僧에게

당신이야말로 인간고를 모르는 신선이 아니냐고 편지를 했더니

기호선인騎虎仙人의 이야기를 적어 왔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길에서 범을 만나 엉겁결에 범의 등에 올라탔더니 범도 놀라서

사람을 업은 채 시가市街로 달려왔다. 시중 사람들이 이 범을

타고 온 사람을 구경하며 저마다 절을 하고 빌며 ‘신선님’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기가 막혀서 “신선은 신선일지 모르나 죽을 지경이다.

속 모르는 소리 말라”고 비명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승의 생활도 행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니 행복이 될 수 없고 호강하는 사람은 호강 속에서도 더 큰 불행이

있다. 행복이란 결국 없는 것인가.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가끔 행복스러운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행복의 정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생활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예술에서 미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석굴암의 돌부처는 황금이나 보옥이 아닌 화강석으로

된 것이지만, 황금 보옥으로 바꿀 수 없는 미를 가지고 있다.

모래와 흙으로 빚어진 고려의 청자나 이조의 백자는 또 얼마나 고귀한가.

이조 목가구木家具의 일품逸品들은 침향목이나 화류樺榴가 아닌

배나무나 물푸레가 고작이다. 신리의 금관은 순금으로 된 찬란한

공예품이다.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금에 있지 않고 예술적 미에 있다.

 

 미는 균형과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이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미는 비참하게 깨어진다. 생활도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따뜻한 안정감과 오붓한 행복감을 느낀다. 균형을 잃은 생활은

부조리하고 살벌하다. 현대인의 불행은 이 생활의 부조리와 불균형에

있는 것이다. 석굴암의 부처, 고려의 청자, 이조의 백자. 여기에는

한국인의 순정과 한국인의 개성과 한국인의 멋이 유감없이 그 균형과 조화

속에 이루어져 있다. 생활에 있어서도 이 순정과 개성과 멋이

균형과 조화 속에서 빛날 때 신라의 금관같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행복이

깃들 것이다. 신라의 석공이 화강암을 다루듯 생활을 매만져

나가면 그 생활은 아름답고 행복스러울 수 있지마는, 취한 운전수가

기분에 맡겨 자동차를 몰듯 나가는 생활이란 또 얼마나 위험한가.

 

 경제가 균형을 잃고, 문화가 조화를 잃고, 눈과 귀만이

공중에 떠있는 현실은, 실로 제정신 못 차리고 취한 운전수가 몰고 가는

자동차같이 위험한 것이다. 이 운전수의 장담과 기분이란 또 얼마나

위험한가. 여기에 불안감과 공포와 불행의식이 감도는 것이다. 파멸 직전의

향락, 앞을 못 내다보는 찰나의 행복의 추구. 현대 생활의 불행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난이 곧 불행이 아니다. 고난을 극복할 의지를 잃는

것이 불행이다.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온다. 균형과 조화는

고난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오고 행복은

이 마음의 여유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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