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악 수 / 나태주

윤소천 2020. 1. 30. 19:52


악       수




가을 햇살은

모든 것을 익어가게 한다

그 품 안에 들면 산이며 들

강물이며 하다 못해 곡식이며 과일

곤충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 까지

익어가지 않고서는 배겨나지를 못한다


그리하여 마을의 집들이며 담장

마을로 뚫린 꼬불길조차

마악 빵 기계에서 구워낸 빵처럼

말랑말랑하고 따스하다


몇 해 만인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동갑내기 친구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얼굴

나는 친구에게

늙었다는 표현을 삼가기로 한다


이 사람 그동안 아주 잘 익었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진 친구의 손을 잡는다

그의 손아귀가 무척 든든하다

역시 거칠지만 잘 구워진 빵이다.


(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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