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후일담

[스크랩] 가족 이야기-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이옥비)

윤소천 2017. 7. 27. 08:12

가족 이야기-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이옥비)


"아버지는 위대한 시인이었으나 우리 집은 몰락해"




안동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가 경성으로 보고한 ‘이원록(이육사의 본명) 소행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위에 선전할 우려가 있으며 (…) 


본인의 성질로 보아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래도 선명 

겨우 4살 때 영결했는데도 딸에겐 아버지 육사 기억이 선명한 듯했다.  “아버지는 아이보리색 양복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어린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셔서 핑크색 모자, 자주빛 원피스, 주름 넣은 반바지, 구두 등을 사다주곤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밀짚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포승줄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 가신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여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아버지 모습도 전했다. 아버지의 성품이 늘 강직했다는 어머니의 전언도 그 중 하나였다.  원기, 원일, 원조 등 육사의 6형제가 모여 시를 발표하고 논평하는 시회(詩會) 날이면 장원을 가려 서로를 격려하는 등 우애가 깊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학창시절이던 1960년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신석초 시인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줬었다. 


“너희 아버지는 장안 최고의 신사였던데다 자존심마저 대쪽 같았다.  변장술에 능하고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실력은 가히 명사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는 권총 5자루를 촛불을 꺼놓고 해체한 뒤 짧은 시간에 다시 조립해낼 만큼 무기를 잘 다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 여사는  동경에 있을 때 내가 퇴계 15세손이라고 하니까 한 일본인이 존경을 표하고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난 아버지때문이라도 너희를 존경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고 했다. 






1943년 4월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독립 투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일제에 무릎을 꿇고 변절했다. 

친일로 돌아서 침묵했다. 한 술 더 떠 일제의 앞잡이가 돼 민족을 기만하는 지식인도 있었다. 

육사는 홀연히 견위수명(見危授命: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하는 선비의 길을 걸으며 외로운 지사로서의 마지막 행로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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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정호경의 수필마을
글쓴이 : 이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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