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후일담

[스크랩] 지례 예술촌장 김원길 인터뷰/이안나(이현실)

윤소천 2017. 10. 21. 10:16

탐방 대담

지례 예술촌장 김원길

인터뷰어 : 이안나 기자

 

 

창강蒼江 김원길金源吉 선생은 데뷔 작 “취운정 마담에게”로 문단에 잘

알려진 분이다. 그러나 그는 안동에 살고 그나마 깊은 산중에 살기 때문

에 서울의 문단행사에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게다가 워낙 과작이어서

10년 터울로 시집 한 권 씩을 낼까말까 이다. 혼자서 산 중에 창작마을

“지례예술촌”을 건립하고 운영하느라 30년 세월을 흘려보냈으니 그 사

선배들은 세상을 뜨고 친구들은 늙어버렸다. 사람도 시도 잊혀져 갔

. 그런 그가 2011년에 평생 쓴 99편으로 고희 기념시선을 내더니 지난

여름 4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시중 서점에도

보이지 않는 그의 시집이 산중에서 무더기로 소비되고 있다니 이 무슨

변괴인가? 시가 읽히지 않는 땅 한국에서, 달랑 노인 내외 둘만 사는 산

골에서 그는 대체 어떤 마케팅을 한 것일까? 기자는 큰 맘 먹고 구절양

길을 돌고 구름을 만지며 산을 넘어 선생을 찾았다.

선생께서는 당신을 주인이라 불러달라 하셨다.

 

일시 : 201511월  일

장소 : 지촌문학관 대문간에서 앞산을 보고 앉아서

 

기자 : 정말 깊숙한 산중이네요. 어떻게 이렇게 외딴 곳에 마을을 옮길 생각

         을 하셨나요?

주인 : 안동시내에서  차로 45분 거리에요. 서울 사람들 통근 시간 치면 아무

         것도 아니잖습니까? 경치도 좋고---.

 

 

                                (지레 예술촌 전경)   

 

기자 : 워낙 구불구불한데다 차가 안다니는 외길이어서 그랬나 봐요. 어쨌든

         대한민국 최고 오지임은 틀림 없네요.

주인 : 그런가요? 지금이야 약과지요. 400년 전 우리 선조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을 적에는 어떻게 다니셨을까요? 우마불통의 산길 물길을 걸어서

         70리를 가야 읍내까지 갔지요. 하루만에 못갔지요. 임금도 우리 동네에

         올려면 이십리 밖에서 말을 내려야 한댔어요. 험로였지요.

 

기자 : 그래도 살기는 좋았던가보지요?

주인 : 사는 건 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안빈낙도의 삶에 만족

         하신것 같았어요. 처음 이 마을에 오신 입향조는 내 13대 할아버지이

         신데 문집에 보면 이런 글이....

 

         聲名非我期  성명비아기요

         寂寞固所欲  적막고소욕이라

         江深鱖魚肥  강심궐어비하니

         此間生涯足  차간생애족이라.  

 

         명성은 내 기대하는 바 아니요

         적막이 진실로 소원이로다

         물 깊은 데 쏘가리 살쪄 있으니

         이런 가운데 내 삶이 흡족하다오.‘ 했어요.

 

앞 강엔 큰 쏘가리가 많았지요. 흉년과 질병, 교통 불편에 힘들 때도 있었

겠지만 외부의 간섭없이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자유롭고 자연 친화적인

삶을 누리셨을 거예요. 마치 무릉도원 사람들처럼. 그러면서도 차원 높은

정신세계가 엿보이는 시를  남기셨는데 후손들이 그 시에 감동을 받아서

이 오지를 떠나지 않고 가난했을 망정 자부를 느끼며 살았던 것 같아요.

시 한번 들어 보실래요?

 

기자 : 지촌 김방걸 선생의 '무언재 운 韻無言齋 韻' 말씀이지요?

주인 : 어떻게 아셨어요?

기자 : 선생님의 다른 글에서 읽었어요. 한번 더 듣고 싶은데요.

주인 :一臥蒼江歲月深  일와창강세월심  강촌에 돌아 온지 몇 해이런고

 

   幽居不受點盡侵  유거불수점진침  숨어사니 한 점 티끌 묻어오지 않네.

 

   已知漁釣還多事  이지어조환다사  고기잡이 낚시질도 번거로웁고

 

   更覺琴碁亦攪心  갱각금기역교심  거문고 바둑두기 심란해지네.

 

   石榻任他風過掃  석탑임타풍과소  거닐다 앉던 바윗돌은 바람이

                                                  쓸고  있고

 

   梅壇輸與鳥來吟  매단수여조래음  꽃밭도 내버려 둬 새들 와서 우짓네.

 

   如今全經營力  여금전생경영력  이제껏 힘쓰던 일 모두 접고서

 

   終日無言對碧岑  종일무언대벽잠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 보네.

 

   어때요, 이 시?

 

기자 : 선생님의 번역이 참 잘 된 것 같아요. 느낌이 그대로 오는데요

주인 : 읊을 때마다 달라지지요. 저번엔 첫구절에 ‘세월심歲月深’을 ‘참

         오래 되었구나’했는데 이번엔 ‘몇 해이런고’로 읊어지네요. 번역

         문도 시가 되어야 해요.

 

                                        ( 겨울 전경 )

 

기자 : 설명 좀 부탁할래요.

주인 : , 보세요, 속세로부터의 잡음이 안들리는 것이야 지리적 조건

         이어서 남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자기 내부로부터의 흔들림을 스

         스로 단속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습니까고기잡이니 거문고니

         바둑두기같이 보통사람들이 소위 신선놀음이라고하는 것까지 명

         상에 방해가 된다고 기피하고 있지요그리고 평범한 일상과 모든

         세속의 할 일을 접고서 종일토록, 요즘 아이들 말로 멍때리고 앞

         산바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마음을 비운 상태이지요.

         이런 경지를 추구하셨는데 저는 끝 구절 ‘종일무언 대벽잠’이 도

         연명의 ‘유연견남산’과 비슷하게 느껴져요.

 

기자 : 그렇네요. 이집 당호가 왜 '無言齋무언재' 인가했더니 이제야 알겠

         네요. 그리고 지촌이 그때 바라보던 저 앞산을 3백 년 후인 지금도

         김선생님께서 보고 계시는군요.

 

주인 : 이제 제가 왜 수몰되면서 집을 여기로 옮겼는지 이해가 갑니까?

         할아버지가 보던 산을 나도 보고싶었던 거지요. 그분과 같은 삶을

         선택을 한 거지요. 물론 그 분 또한 그분의 아버지, 산림처사 표은공

         을 본받으셨고 표은은 퇴계를 본받고 퇴계는 도연명을 본받았으니

         내 선택에는 상당히 유력한 배경이 있는 겁니다.(웃음)

 

기자 : 도연명이 귀거래사를 쓴 게 40대 초반이라는데 선생님 이리로 옮긴

         건 몇 살 때였지요?

주인 : 내가 1983년에 마음을 굳혔으니까 41세 때지요. 나는 일이 많아서

         그런 명작을 쓰지는 못했지만 여기 살면 무척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걸 이겨내려면 결국 그 적막에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결국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란 시를 쓰게 되어 84년에 그 제

         목을 표제로 두 번 째 시집을 냈지요.

 

                        (안개에 가리운 예술촌)

 

기자  : 선생님 시 중에서 이 시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 있을까요?.

주인 : 많지요. 가만히 관조하고 명상하는 태도가 그것이지요. 내 작품 중

        '꽃그늘에서', '', '고요'도 그런 축이지만 특히 '내 아직 길들지 못

         해‘가 어딘가 '무언재 운' 과 맥이 닿아 있어요.

 

기자 : 전 그게 선생님 대표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주인 : 그럴까요? 나는 아직 정하질 못했는데, 하긴 그건 내가 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겠죠.

기자 : 한 번 외워 주시고,  그 시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주인 : 미닫이에 푸른 달빛

         날 놀라게 해

 

         일어나 빈방에

         좌불처럼 앉다.

 

        내 아직 적막에

        길 들지 못해

 

        버레소리 잦아지는

        시오리 밤길

 

        달 아래 그대 문 앞

        다다름이여

 

        울 넘어 꽃 내음만

        한참 맡다가

 

        달흐르는 여울 길

        돌아 오나니

 

        내 아직 적막

         길 들지 못해.

 

기자 :멋 있어요. 그리고 숙연해 지고 약간 슬프네요.

주인 :금욕과 체념이 깔려 있으니까요.

        자다가 일어나서 밤길을 걸어서 ‘그대‘의 집까지 갔다가 그냥  되

        돌아 오는 건데 화자는 적막에 길들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그게

        잘 안된다는 고백이 담긴 글입니다.

        지촌은 이미 마음을 비우고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을 대하고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데  나는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서 ‘그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되돌아 오는 거지요. 그러니 내가 도연명

        이나 지촌만큼 달관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거지요.

        게다가 이 시에는 달이 세 번이나 나와요.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달에 노출시키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달은 눈이에요. 그만

        큼 자기 존재를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달이 여러 번 나오

        는 거에요. 달이 나를 비춰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요. 마음을 다

        비우진 못 했다는 거지요. 마음이 온전히 평화로운 게 아니란 거죠.        

        어딘가 시름과 외롬이 묻어나 있어요.

 

                       ( 외국인 방문객들 )

 

기자 :지촌의 시가 도인의 경지라면 선생님의 시는 구도자의 경지같아요.

        그런데 시인은 성인이 아니라 ‘사람의 친구’여야 한다면 선생님

        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공감이 가네요.

주인 :그런가요? 하긴 만약 내가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라 하지

        않고 “내 이미 적막에 길들어”라고 했다면 사람들이 역겨워하겠

        지요. 그건 과대망상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말년에 이르면 적막

        해지기 마련이 고 그 적막감을 이겨내려면 체념의 지혜를 따라야

        하는데 그게 간단치가 않지요. 간단치 않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사람들이 공감한 거지요.

 

기자 :그런데, 한국문학에서 이런 스토리를 가진 시가 이게 처음이 아닐

        까요? 적막에 길들려는 노력이라든가, 애인의 집까지 갔다가 되돌

         아 온다든가하는 행동들을 이제까지 다른 시인의 시에서 본 적이

         없어요.

주인 :서양 시에서는 더욱 찾기 힘들 겠죠. 서양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

        은 거개가 애인을 만나러 담을 넘거나 휘파람 신호를 보내거나 세

        레나데를 부르기 십상인데 여긴 다르잖아요.

        이게 동서양을 구분 짓는 차이점이 아닌가 해요. 금욕과 체념이

        주비애가 깔려 있지요. 염불이 슬프듯이--- 

기자 :이건 30 여년 전 작품인데 그뒤 어떻게 달라졌나요?

주인 :차츰 비애가 없는 작품을 써보고 싶었나봐요. 늘 징징대는 어린

        애 같은 내가 싫어졌어요. 시름없는 시들을 찾아 읽고 나도 그런

        세계로 들어간 거죠. 멍 때리기 시가 써졌어요. 그 중 하나가 “고

        요”예요. '적막’이란 단어에는 외로움, 쓸쓸함, 슬픔이 묻어 있는

        데 비해 ‘고요’ 에는 그런 게 없어요. 평화롭죠.

 

        “달도 지고 / 새도 잠든 // 정적 속 / 눈 감고 // 긧 전에 / 스스

        스스 // 지구가 / 혼자서 // 조용히 / 자전하는 // 소리 / 듣는다.

 

기자 :, 이 시! 종로 3가 전철역에 아직도 붙어 있어요!

주인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찍어서 내게 보내 주더군요

        이것도 지촌의 ‘終日無言對碧岑종일무언대벽잠’의 분위기에 맥을

        대고 있다고 봐요.

 

                          (야외 공연장)

 

기자 :여기가 너무 조용하니까 멍때리기하기엔 딱이네요. 지촌문학관을

        아예 ‘멍때리기 문학관’이라고 개명해도 되겠네요.(웃음)

        그런데 선생님 이런 시들 들어 있는 시집 서점에 있나요?

주인 :요즘 시집 팔린단 소문 들어 봤나요? 서점엔 내다 놔봐야 팔리지도

        않을 거고---, 이번에 내가 영어, 일어, 불어, 중국어로 번역한 것,

        아니 내가 직접 한 건 아니고---  집에다 두고 외국인 오면 기념으

        로 주고 있는데 친구에게 선물하겠다며 많이 사 가요.  일전에 홍콩

        에서 여자들이 와서 중국어판 다 가져가 버려서 두 달 만에 재판 찍

        게 됐어요.  

 

기자 :홍콩서 어떤 여자들이 왔어요?.

주인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들이 세계 여러나라에 흩어져 살

        다가 나이 50이 되는 올해에 열네명이 만나서 해외여행을 하다가

        여길 온 거예요. 밤에 심심할 것 같아서 시집을 읽어보라 주었더니

        놀랍게도 서당 마루에 둘러 앉아서 돌아가며 그 시집을 소리내어

        윤독하는 거에요. 이십 육년 째 고택 운영하며 이런 광경 처음이라

        서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었죠. 간자체로 번역된 내 시를 한사

        한 사람이 한 연 씩 읽고 맨 마지막 연은 제창하듯 함께 읽고 나선

        나더러 한국어로 소리내어 읽어달라는 거에요. 그러고 나면 박수치

        고 또 다음 시를 돌아가며 읽곤 했는데 른 편 이상을 함께 읽었어

        요. 마치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처럼 해 보싶었던가 봐요. 정말

        신이 나 했어요. 나는 속으로 아, 홍콩에선 학교에서 시를 이렇게 지

        도하는구나. 늙어서도 시를 가까이하며 사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나자 내게 시집을 사겠다는 거예요. 14명 중 7명이 샀는데  친구에게

        선물하겠다는 거예요. 영어, 일어판, 불어판도 샀어요. ,

        이 올 줄 알았지만 실제상황이 눈 앞에서 벌어진 거에요. 얼마나 놀라

        운 일입니까? 대한민국 서점에선 한 권도 안 팔리는 시집이 외국

        겐 무더기로 팔리니 말입니다.

 

기자 :어떻게 이럴 줄 아시고 준비하셨나요?

주인 :오래 된 일이죠. 2009년에 첫 번역시집 “아내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

        다 한다” 를 냈는데 그때 우리 집에 온 ‘아이비 리그’ 대학생들이 그

        시집을 윤독하는 걸 보고 내 시의 독자가 외국에 더 많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거. 그러자면 외국어로 번역기 쉬워야하고 내용이 국제

        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거라랴 한다고 봐요. 국내에선 명작인데 외국

        인에겐 이해가 안 되는 게 많거든요. 그러니 노벨상도 외국인이 이해

        할 수 있는 것을 골라서 번역하여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하튼

        내 시집이 여러나라에 읽혀서 우리문학의 해외 진출의 물꼬를 트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기자 :번역을 누가 했습니까?

주인 :영어로 번역은 캐나다 사람 마크 라이언이란 원어민 교사가 했는데

        한국에 온지 2년 이 지난 어느 휴가에 예술촌엘 온 거에요. 내가 우

        연히 당신 한국배울려면 내 시집 번역하다보면 무지 실력이 늘것

        이다 했더니 학구적인 청년은 주말마다 드나들며  36편을 번역해

        낸 거에요. 36편은 내가 선정한 것들로서 외국인들이 이해하고 공

        감할 만한 것들을 엄선한 것이었어요. 그의 심혈을 기울인 번역은 영

        문학자 김종길 교수가 칭찬할 정도였. 그 무렵 또 일본인 할머니

        가 예술촌엘 왔는데 그는 한국인과 결혼해서 우리말에 능한 분으로서

        우리 시인 김광림 씨의 시집을 번역한 대단히 실있는 번역가 였어

        요. 그분이 제 시집을 보더니 번역을 자청하였어.

        내가 시집 제목을 무얼로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내 시 중에 “아

        내는 자로 태어나고싶다 한다”로하면 일본에서 대박 날거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출판은 안동에서 하고 말았어요. 그 책은 한--3

        국어로 4판이나 찍었는데 서점에 안내고 예술촌에서 다 소비했지요.

        출판사도 지례예술으로하고 책 뒷표지 날개에 예술촌 지도와 사진을

        넣어 홍보 기능을 담았지요. 책값을 안 받아도 홍보효과는 있을 거니

        까. 영어, 일어 번역을 모두 집에 온 관광객 덕분에 하게 된 셈이지요.

 

                      (야외에서의 퍼포먼스)

 

기자 :불어판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주인 :불어 번역에 다리를 놓아 준 분은 고창수 선생이었어요. 그분도

        처음 게 된 것은 신규호 시인과 영문잡지에 지례를 취재하러

        와서 처음 뵈었지. 영문번역을 잘하시고 사진가이기도한 원로

        시인이지요. 그 뒤에 제가 가입한  T.S.엘리엇학회 세미나를 지

        례에서 했을 때 그 분도 지례에 오셔서 친해 졌는데 2011년에 낸

        내 시집을 보고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프랑스 시인이 성균관대학

        교수로 와 있는데 한국시집을 불어로 번역하고싶어하니 내 시집을

        불어로 번역해보지 않겠느냐는 거에요. 그래서 고선생은 영어로,

        앙트안 코폴라는 불어로 번역하게 되었지요. 책은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출판되어서 나는 그책을 돈 주고 사야했어

        요. 우리 집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관광 안내책 미슐랭가이드 북 덕

        분에 프랑스 관광객이 많이 오는데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거

        든요. 그래서 이번에 역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한-불 대역으로

        편집하여 안동에서 내게 되었지요. 프랑스 사람들이 신기한 선물로

        여기지요.

기자 :중국어 번역은 누가했나요?

주인 :이은화라는 중국 동포 번역가인데 우리 소설을 번역한 경력이 있는

        분이에요. 상해와 북경에서 한글잡지를 발행하는 김구정 사장을 통

        해 소개 받았지요. 김사장은 집 안 고모항렬이에요. 중국동포가 쓰는

        한국말은 현재 남한에서 우리가 쓰는 말과 뉴앙스가 다를 것 같아서

        안동대학의 중국문학 교수의 조언을 받아가며 진행했어요. 모든 게

        인터넷으로 오고가고 했지요. 이젠 웬만한 외국인은 다 커버할 수 있

        어요. 외국인들도 남의 나라의 이 깊은 산골에 와서 자기네 모국어로

        쓰여진 한국시를, 그것도 잘 번역된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를 읽으면

        한없는 친밀감을 느낄 거에요. 이게 바로 BUY KOREA예.

 

기자 :창조경제요, 문화융성이네요

주인 :정부에서 나왔나요? (웃음)

기자 :정부에 하실 말씀 있나요?

주인 :안할래요.

기자 :제게하세요.(웃음)

주인 :이십리 산길에 불빛이 하나도 없어요. 26년 째 졸라도 등 하나를 안

        달아 줍니다. 밤중에, 밤안개 속에 외국인이 사고라도 날까봐 밤마

        다 산꼭대기까지 마중을 나가야 해요--- 그만합시다. 혈압 올라요.

 

기자 :왜 안해 줄까요? 이렇게 유명한 곳인데---

주인 :표가 둘 뿐이라는 거에요. 관광객은 자기표가 아닐 테니까.

기자 :어떡하실 거에요?

주인 :걱정 마세요. 곧 선거가 있으니까요. 선거 직전에 각국 대사 초청

        공연을 밤에 가지는 거에요.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달아 주겠지요.

 

기자 :꼭 그렇게 하십시오. 곧 그렇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

        니다. 시간이 모자라서 아쉽습니다.

주인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끝  -

 

 

 

출처 : 정호경의 수필마을
글쓴이 : 이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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