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어둠을 바라보며 / 정목일

윤소천 2015. 6. 25. 19:37

 

 

 

 

산골의 밤은 잘 익은 머루 냄새가 난다. 덕유산 깊숙이

들어앉은 영각사의 저녁 예불이 끝날 즈음이면, 문득 하산하는

주지 스님의 장삼자락 빛 산그리메...... 산그리메에 묻어오는

머루 빛 적막. 그 산그리메가 이끌고 오는, 측량할 길 없는

어둠의 밀물. 산골짜기와 사방에 와 잠겨 버리는 어둠은,

화선지의 먹물처럼 번지어 빛과 소리를 정적의 깊은 수렁에

내몰고, 자물쇠를 잠그고, 고즈넉이 돌아온다. 나는 간혹 그

어둠과 만나기를 좋아한다. 어둠과 만나는 산과 나무의 묵시의

얼굴, 고요히 눈을 감고 생각의 깊은 심연에 빠져들어,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 본질적인 근원을

생각나게 하는, 이런 어둠을 좋아한다. 주위는 무한히 펼쳐지는

어둠과 정적이 교직하는, 돌을 던지면 풍덩 소리가 날듯 한 고적감.

거울을 깨뜨린다면 쟁그랑 소리가 온 골짜기에 울릴 듯싶다.

그렇다고 어둠이 삼라만상을 죄 잠재우는 게 아니라 그럴수록 눈뜨는

또 다른 세계. 나뭇잎에 와 서걱거리는 바람. 바라 뒷산 가까이서,

정적의 바다에 소리의 파문을 던지는 부엉이. 밤이 지나면

풀잎에 수천의 이슬로 맺혀있을 풀벌레 소리......

호젓이 신비의 나라로 이끄는 반딧불.

 

밤에는 낮보다 더 밝게 눈뜨는 숲의 부엉이 눈동자 같은

세계가 몰래 나타난다. 숲 속에 어슬렁거리는 짐승의 푸른 눈빛.

알게 모르게 숲의 어둠에 부서져 내리는, 이미 수천 년 전에

떠났던 별빛. 밤은 가뭇없이 보이지 않는 어떤 형체가, 잠자던

형체가 나타나는 세계인가. 육체보다 정령들이, 초원을 달려가는

바람의 형체가 또렷이 드러나고 있다. 산을, 들을, 사뿐사뿐

단숨에 거니는 바람의 발자국이 일으키는 여운. 보이지 않는

나무의 귀에 와 속삭이는 목소리. 밤에는, 잠자는 건 잠드는

것이지만 넋들은 깨어 눈뜨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무덤들이 더

또렷한 무덤들이 되고, 어쩌면 넋들은 깨어 자기의 묘비명을

한 번 읽어보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낮에는 너무 미미하여

들리지 않았으나 밤에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풀벌레

소리. 우람하던 덕유산도 밤에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얼마나 빛나는가, 작은 반딧불...... 낮에는 고작 이 세상의 일뿐이

생각되지 않으나, 밤에는 더 높은 차원의 우주를 느끼게 한다.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밤하늘. 통치자도 없건만 수많은 별들이

서로 제 갈 길로 부딪치지 않고 운행하고 있는 평화의 아름다운

나라...... 문득 망망한 어둠 속으로 나들이 가는 바람의 품속으로

내리는 별빛. 시공을 넘어 보이지 않는 두루마기 차림으로,

이 밤을 행행(行幸)하는 넋들에게 부서져 내리는 별빛. 수풀의

보이지 않는 여백과 같은 그 무언의 언어를 찾아보길 좋아한다.

아청빛 나무, 색깔과 향기 다 풀어 어둠에 파묻는가...... 어둠의

손길은 풋열매의 얼굴을 쓰다듬어, 풋열매의 가슴에

씨앗을 아로새겨 넣는가......

 

수만 길 땅 깊이 파묻혀 꿈꾸는 광석, 땅 속 광맥까지 스며들어

광석의 꿈이 되어 주는 어둠을 본다. 나는 곧잘 무한의 가능성을

잉태하는 어둠 속에, 나를 파묻기를 좋아한다. 산이 품고 있는

광맥처럼 파묻히어 안온히 잠기면, 가끔 영각사의 주지승과 정갈히

만난다. 내가 간혹 주지승과 말 한 마디 없이 눈빛으로만 서로

만나는 것이지만 가슴에 따스한 미소로 만나고 있는 것과 같이......

물속에 잠겨 몇 천 년 산소의 물소리 바람소리 다 듣고 지낸,

누구도 발견치 못한 산수경석의 천연스러운 낮잠. 그 낮잠에

신비로운 향기 보태는 어둠. 바람은 애잔한 풀벌레 소리, 정겨운

개구리 소리, 수렁거리는 별빛을 낱낱이 끌어 모으고, 또한 낱낱이

분해하여 어둠에 풀어 넣는가. 수만 가지 형태의 빛깔, 향기와

소리, 죄 모아 이루는 들여다볼 수 없는 가없는 어둠을 본다.

 

나는 방에서 호롱불을 꺼내 본다. 하나, ...... 몰려드는

나방이, 여치, 이화명충,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 밤은 빛을

흡수시켜 버리건만, 이 작은 빛줄기가 자력처럼 어둠의 빛을

연연해하는 것인가. 빛을 생각하지 않는 어둠이란 곧 죽음. 인간은

이 어둠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어둠은 영원히 우리를

잠재울 뿐인 것을, 어둠이 포근한 잠을 가져다주는 것인 것을......

인간은 결국 모두 한줌의 흙이 되어, 무덤 속의 어둠이 되어

하루의 제 일을 남겨 놓을 뿐이다. 어둠에 안겨 평화로이 눈감고

있는 무덤. 어둠이 있으므로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어둠 속에 그대로 뒤섞일 수 없어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풀벌레들의 신음. 산과 산이 만든 골짜기를

타고 쉬임없이 흘러내리는 개울물의 행진. 어둠 속에서 파도치는

역사의 맥박. 무덤 속에 드러누운 해골의 유언. 썩어 흙이 되어 또

생명을 키우는, 사라질 수 없어 어딘가에서 일어서는 넋의 얼굴. 어둠은

죽음이 아니다. 어둠은 오히려 생명의 나이테를 짜는 산실(産室).

어둠에서, 죽음에서, 무덤에서 나는 더욱 생선 비린내같이 진한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 나는 알고 있다. 어둠을 이해하며 어둠에 파묻혀

빛을 탄생시킨 사람들의 자의식의 신음을. 어둠에서 일어서는 소리.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어둠.

 

내가 거기서 태어난 어둠이여

불꽃보다 너를 사랑한다.

불꽃은 세계를 한정하고

그 속에서 선명히 타오를 뿐

둘레 밖에서는

아무도 그를 모른다.

 

그러나 어둠은 지니고 있다.

형태와 불꽃, 짐승과 나를

닿이는 대로

인간과 권력까지도

나는 밤을 믿는다.

 

그가 <고요 시집>에서 읊었던 고요한 어둠을 본다.

어둠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간직하고 있다. 어둠은 절망을 넘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잉태시킨다. 캄캄한 폐쇄적 유학의 시대에

살다 간 정다산(丁茶山)의 어둠. 전남 강진에 유배된 다산의

고독과 절망. 관리생활과 출세를 단념한 캄캄한 어둠에 파묻히는

다산이 아니라 오직 자의식의 등잔불로 모든 분야에 걸친

이상적인 개혁안을 작성하였던 다산의 어둠...... 어둠 속에서

농민들과 함께 들었던 횃불. 징소리에 청명하게 트여 오는 역사의

여명. 어둠은 하나의 빛을 위하여 예비하는 신음인가......

귀가 먼 베토벤의 절망적인 어둠. 바람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소리의 어둠. 그 속에 오롯이

피어난 마음속의 악상(樂想)......

 

어둠이란 무엇인가? 나무에게, 꽃에게, 또한 풀벌레에게?

분간할 수 없는 이 어둠은 무엇인가? 파아란 하늘을 가리고,

분수처럼 뿜어내던 햇빛을 가로막고 날개를 붙잡아맨 이 어둠.

산과 바위의 침묵을 더 휩싸는 어둠이 아니면, 산과 바위가

묵상하는 제 모습을 지닐 수 없듯이 어둠 때문에 나무는 더욱

빛으로 발돋움하여 푸르고, 꽃이 훈향을 뿌리면 벌레들은

자유로이 날개를 젓는 것을...... , 빛을 예비하여 맞기 위해

이 어둠은 차라리 거룩하기까지 하다. 어느덧 별이 기울고 있다.

어둠이 투명해지고 있다. 어둠은 산안개로 되었다가, 스님은

오직 혼자뿐이신 영각사 주지승의 새벽 독경소리로 물러가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어둠과 빛이 교차되는 찰나를 본다. 모든

물체가 제 모습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모습과 표현을 본다.

어둠을 바라본다. 그 속에 키 크고 여읜 사나이가 서 있다.

어둠을 바라본다. 망망한 어둠은 키 큰 사나이를 휩싸고, 산과

나무와 풀벌레들과 함께 파묻혀 사라진다. 어둠을 바라본다.

어둠의 저편에서 잠자리 날개 빛의 여명이 소리 없이

밝아 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