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종교 없이도 ‘종교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가 앞으로 인류생존의
열쇠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전 세계가 물신物神 숭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20세기 끝머리인 오늘날 언젠가 한번 기웃거려볼만한 생각이다.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라. 이름 있는 목사치고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몇 있는가? 그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자녀 교육비는 따로
받고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화엄사가 마당을 돌로 깔았다가
다시 벗기는 공사를 했다. 돈이 다른 데로 새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시주받은
돈을 쓰는 데는 종단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부러 돌을 깔았다가 벗긴다는
말도 있었다. 가톨릭 천진암 성지에는 왜 그리 큰 성당을 짓고 있는가?
그곳엔 조그맣고 고졸古拙한 옛 성당을 남기고 서울이나 대도시에
큰 성당을 지어야 제격일 것이다.
IMF 이후에 교회 신도가 늘었다고 한다. 절을 찾는 사람도 늘었을
것이다. 경제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연보와 시주를 더 내야 한다고
목사가 권유한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한때는 기복 신앙을 종교의
치부恥部로 생각해왔지만 나도 요새 와서는 차라리 그것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 아닌가 하고 독하게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인간의 내면 만들기,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확대 등등의 종교의 광휘는
종교의 아름다움이지 결코 종교의 실체는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드는 것이다.
이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시비를 걸 때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기복신앙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치부하고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듯이 타인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다가
능지처참에 해당되는 십자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의 삶이나, 진정한 삶은
욕망의 삶을 벗어나는 데 있다고 가르치며 부귀영화를 버리고 팔십
세까지 탁발하다 식중독으로 세상을 뜬 불타의 삶은 종교의 실체가 아닌
종교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을 하나의 조직적인 이론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8세기에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종교의 ‘아름다운 계약론’ 일지도 모른다. 계약은 이행을
요구하기 때문에 당장 실현되기는 힘들 것이다. 루소 생전에 그의 설이
제대로 빛을 얻는 것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 우리는 그의 빛 속에서
살고 있다. ‘아름다운 계약론’도 만들어지면 언젠가 빛을 볼 것이다. 그
‘계약론’은 아마 지금 한창 푸대접받는 인문학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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